남대문시장은 동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의 명소(名所)로 외국인 관광코스가 된지 오래다. 조선초기인 1414년부터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남대문시장 중에 본동상가 A동과 B동 사이의 약 110m 골목길이 최근 ‘특화거리’로 지정돼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대구 달성공원과 큰장 네거리 옆에 있는 대규모 전통시장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1년 설치된 대구의 경상감영의 서쪽 문밖에 있다고 서문시장으로 불렸다. 그 전엔 대구 읍성 북문에 있었다. 1919년 3·1운동때 서문시장 상인들이 대거 참여하자 일제는 1922년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것을 막기 위해 현재 위치로 시장을 옮기고 공설시장으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자리에 터를 잡게 됐다. 

조선후기엔 삼남(충청, 경상, 전라) 최대 시장이자 평양장, 강경장과 함께 3대 시장으로 불렸다. 6·25전쟁의 폐허를 딛고 직물· 섬유산업 발전으로 포목 도·소매상이 전국 최대 시장으로 이끌었다.

이곳이 물류와 상업 중심지가 된 것은 무엇보다 교통이다. 낙동강을 통해 경상도의 물자와 남쪽의 해산물 등이 이곳으로 수송됐고, 철도 개설후엔 일본 물자까지 모이면서 상업요충지가 됐다. 

지금 서문시장 인근에는 남문시장과 김광석거리로 유명한 방천시장이 있다. 국내 최고 약재시장인 대구 약령시도 그 옆에 있다. 서문시장 점포는 4,000여개, 상인은 2만여명에 이른다. 명성만큼 시련도 많았다. 광복 이후 20여년 동안 부산 국제시장과 함께 크고 작은 화마(火魔)에 여섯 번이나 불탔다. 전쟁중이었던 1952년을 비롯해 1960년, 1961년, 1967년, 1975년, 2005년 12월 29일 한밤중에 이어 2016년 11월30일 한밤중에 또 대형화재를 겪게 됐다.
 
그러나 상인들은 오뚝이처럼 일어났고 대선 때마다 여야후보들이 반드시 찾는 ‘영남권 현장정치의 1번지’였다. 박근혜 대통령도 중요한 정치적 고비 때마다 방문해 열렬한 지지를 확인했다. 그러나 이번 화재 다음날 방문땐 ‘염치없이 왜왔냐’는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시장에 가면 그대로 드러나는 민심이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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