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말뜻은 ‘보전하여 지킨다’
이땅의 보수는 말뿐 실체가 없어
기득권과 이권 지키기에만 급급
보수·부패가 동의어처럼 돼버려
가짜 보수 위에 새집 지을 수 없어
엄격한 단죄 있어야 재건길 열려

 

김병길 주필

새누리당이 분당하면서 ‘가짜 보수, 진짜 보수’ 논란이 불거졌다. 진짜 보수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이론적 조명은 유명한 사상가들의 책에 다 나와있다. 보수(保守) 앞에 ‘개혁적’ ‘합리적’ ‘중도적’ ‘정의로운’ ‘따뜻한’같은 수식어를 붙이는 것도 작위적으로 보인다. 

보수신당은 안보는 정통보수를, 경제와 사회는 개혁보수를 지향한다. 따뜻한 복지 체계와 튼튼한 사회안전망을 강조해 보수의 지평을 넓히겠다는 것이다. 특히 분당 선언문에서는 ‘보수’란 단어가 24번 거론되고 보수가 중요시하는 법치, 시장경제, 안보 등이 강조됐다.

보수의 성찰은 보수라는 개념을 뚜렷이 하는 일에서 시작된다. 보수는 ‘잇고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말은 잇고 지킬 대상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 말이 쓰이는 상황에 따라 잇고 지키는 대상이 결정된다. 

우리사회 보수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더 철저하게 지향하는 정당과 후보를 지지해 왔다. 인류의 경험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가장 낫다는 것을 증명했다. 자랑스럽게도 대한민국의 역사는 그 증명이다. 식민지 경험과 전쟁의 파괴에서 일어나 자유롭고 풍족한 사회를 이룬 우리 역사는 많은 후진국에 영감을 주었고 그들이 발전할 길을 보여주었다.

보수와 진보의 감별법을 보면 역사부터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서양에서는 보수와 진보가 끝없이 대립했다. 합리론과 경험론이라는 지적 전통이 논쟁의 뿌리였다. 

보수의 기원은 1660년 영국의 왕정복고 과정에서 형성된 토리당에서 찾는게 보통이다. 당시 제임스 2세를 지지했던 왕권 옹호파의 귀족들은 ‘토리(아일랜드 산적)’라고 불렀다. 이에 반해 제임스 2세를 몰아내려는 의회 인사들을 ‘휘그(스코틀랜드 부랑아)’로 칭했다. 

양당제의 시초가 됐다. 정작 보수주의가 근대 정치 이념으로 성립된 것은 100년 뒤인 에드먼드 버크에 의해서였다. 버크는 정치적 변화를 숙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 변화에 적응하려는 유연한 태도를 강조했다. 

필요하면 반대당의 정책을 훔쳐오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 유연성이 현대 영국 보수당을 승승장구케 했다. 영국 보수당이 유럽 정당들 가운데 가장 성공할 수 있었던 다른 이유는 ‘통치에 적합한 정당’이라는 이미지를 국민에게 심어줬고 집권을 통해 실증한 것이다.

국민생활에 직결된 경제·안보에서 보수당은 자유당·노동당보다 앞서 갔다. 보수당이 결속과 충성심이 강했던 점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보수당은 경쟁 정당인 자유당·노동당에 비해 내부 분열이 적었고 국민 통합에 주력했다.

보수의 주류는 온정적 보수주의이다. 전통과 권위를 존중하면서도 사회개혁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융통성을 보이는 것이다. 하나의 국민으로서 사회적 결속과 통합을 위해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보수’란 ‘보전하여 지킨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자유시장경제나 민주공화국 같은 기본원칙 같은 이미 확립된 가치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땅엔 그런 보수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말만 있을 뿐 실체는 없었다. 허상을 어떻게 보전하고 지킬 수 있겠나. 결국 이 땅의 자칭 보수주의자들은 다른 것을 찾아서 지키려 애썼다. 기득권과 이권이 그것이다. 보수와 부패가 동의어처럼 돼 버린게 그래서다. 보수란 말이 매력을 얻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이 땅의 이른바 보수정당들은 당 간판에 단 한번도 ‘보수’라는 이름을 써본 적이 없다. ‘민주’니 ‘자유’ ‘정의’처럼 진보에게 더 어울릴 용어들을 선호했다. 아니면 ‘한나라’ ‘새누리’같은 가치중립적 표현을 썼다. 그런 가면을 쓰고서도 자칭 보수들은 여전히 같은 것을 추구했다. 기득권이나 이권같은 것을.

지금은 대통령의 통치권 위기가 보수의 책임으로 덧칠되고 있다. ‘보수 위기’ ‘보수 몰락’ ‘가짜 보수’라며 책임을 전가한다. 그러나 현 사태는 국정운영의 문제이며, 보수이념과는 무관하다. 보수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견강부회이다. 

무엇보다 가짜 보수 이념 위에 새집을 지을 수는 없다. ‘별의별’ 보수가 활개를 치는 지금 가짜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해봐야 진짜 보수가 되기에는 한계가 있다. 

보수의 외피를 쓰고 속으로 오만, 독선, 무분별의 분탕질을 일삼아온 가짜 보수를 진짜 보수의 가치를 공유하는 많은 국민이 엄격하게 단죄할때 보수 재건의 길이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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