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근 전 울산시인협회장·수필가

붉은 닭의 해를 맞은 새해에 좋은 소식이 날아들었다. 지난 1월 24일자 울산매일신문에 그동안 개인 저택의 뜰에 옮겨져 있던 낙화암 쌍바위가 ‘주민 쉽게 접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전’한다는 기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정말 오랜 숙원이던 바람이 이뤄지는 것 같아 축배라도 들고 싶었다. 이 문제는 비단 필자뿐만 아니고 동구민과 특히 관심있는 여러 향토사가들과 관계 기관의 관심사였다. 실로 낙화암 쌍바위가 제자리를 떠난 지 37년 만의 일이다.

낙화암의 옛 위치는 행정상으로는 울산군 방어진읍 서부리(명덕)이지만, 방어진(동구) 사람들은 ‘명덕 낙화암’으로 부르지 않고 ‘미포 낙화암’으로 불렀다. 그만큼 미포리(동) 입구인 송전 마을의 낙화암천(도랑)을 경계하여 미포리와 서부리 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낙화암은 동면 8경 낙화백사(洛花白沙)에 등장할 만큼 경관이 빼어난 곳이어서 해마다 마을 사람들이 화전을 하거나 남목 초등학교를 비롯한 동부초등(화정), 방어진초등학교에서도 소풍을 가기도 했던 명소였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지만 차츰 자라서 철이 들면서 바위 벽면에 새겨진 굵은 글씨가 예사롭지 않게 보였으나 그 때는 딱히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으며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훨씬 훗날 필자가 향토사 연구회에 소속되면서 이 암각시에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을 땐 이미 낙화암 쌍바위는 그 자리에 없었다. 시가 새겨진 쌍바위는 불당골(서부동) 김영주 한국플랜지 회장 댁에 옮겨져 있었다. 이 시문을 확인하기 위해 김 회장 댁을 방문하려 했으나 허락받기가 어려웠다. 생각다 못해 망원렌즈 사진기를 준비해 원거리 촬영에 성공했다. 비록 시문이 흐릿했으나 바위의 모습은 옛 그대로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1930년대 지역 출신이던 이만우(당시 방어진 금융조합 근무) 씨가 한학에 밝았고 이 시에 호감이 있어 한지에 붓줄로 필사해 둔 것을 그 분의 조카인 이융산(李隆山·76세·당시 서부새마을금고 이사장) 씨에게 양도받아 원문과 비교 해석할 수 있었다. 원문을 진주 경상대학 한문학 정호용 교수에게 의뢰해 풀이한 내용은 가슴을 저미게 하는 슬픈 시문이었다.「그 옛날 어느 해인가 꽃이 떨어졌던가 / 봄바람 건듯 부니 꽃은 다시 피었건만 /바위에는 봄이 와도 그 때 그 사람 보이지 않고 / 달빛만 하염없이 푸른 바다에 서성이네」

원유영(元有永)이라 큰 글체로 이름을 새겼고 다음은 작은 글체로 장응윤(張應潤), 김동협(金東夾), 장재한(張再翰), 김규칠(金奎七)은 육방중(이, 호, 예, 병, 형, 공) 공방(工房)에 속한 사람들로 이들 4인이 도광기축년(道光己丑年: 단기 4162년 순조-조선 23대 왕- 29년)에 중각(重刻)했다고 했다. 원유영(元有永)은 방어진 남목 감목관(南牧 監牧官)으로 봉직했던 사람이다.

이렇듯 유서 깊은 낙화암을 그냥 개인 저택의 밀폐된 공간에만 두기가 안타까워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공간에 들어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 1993년 지역신문 문화면에 이런 사실을 게재했다. 당시 문화부 기자가 찾아와 큰 관심을 가졌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한동안 조용했다.

그러다 필자는 놀라운 사실을 알아내었다. 낙화암에서 실족해 바다에 빠져 죽은 여인이 기생이 아닌 궁녀였음을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엿들었다. 신라 헌강왕 때 풍광명미한 곳을 나들이 나왔던 왕과 궁인 일행이 이 낙화암에서 놀다 어린 궁녀가 그만 실족해 바다에 빠져죽었다는 것이다. 그 날 그 궁녀가 입고 있었던 붉은 비단치마가 벗겨져 내밀린 바위섬이 홍상도(紅裳島: 그 이전에는 파련암(波蓮岩)으로 불렸다)라 불렀고, 푸른 저고리가 내밀린 백사장은 녹수금의(綠袖錦衣)라 불렀다. 즉, 푸른 비단 옷 소매가 떨어져 내밀쳐진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같이 글자 하나에도 깊은 의미와 뜻이 숨어있는 낙화암 쌍바위는 꼭 옮겨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관련기사가 1996년 9월 울산매일신문에 실렸다. 이로써 울산시민들이 차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이 기사를 본 동구 정보통신 고교 이영춘 교장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문화재로 지정할 것을 주장하며 필자와 뜻을 같이 하기로 했으나 며칠 뒤 우연찮게 이영춘 교장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혼자서 동분서주하던 필자는 동구 문화원에서 지역사 연구회가 결성되면서 동구지역의 문화유적을 함께 연구 답사하기로 하고 합류해 많은 유적의 발굴 조사에 안내를 했다. 그 첫 번째가 낙화암 쌍바위의 아랫부분의 시문이 새겨진 지대석 바위가 영빈관 뜰이 아닌 영빈관으로 오르는 길 옆 배억문 씨(녹수금의 지방민)의 선친 묘지 옆에 방치돼 있는 것을 연구 회원들을 안내해 탁본을 뜨게 됐고, 서부동 불당골의 마애여래불상을 학계, 문학계에 드러냈다. 또한 그 위치를 여러 답사팀마다 안내했고, 옥류천 상류의 성혈군, 청자 도요지, 마성 등 수많은 유정지를 발굴 조사하는데 열성을 다했다.

이후 2013년에는 울산매일신문이 큰 관심을 가지면서 낙화암 쌍바위 기사를 게재해 또다시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렇게 긴 시간동안 노고를 아끼지 않고 헌신해 온 필자와 언론에 감사한다. 3,000만원 예산까지 편성한 관계기관에도 고마운 마음 전하며, 이 기쁨을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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