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회의서 ‘신탁통치’ 결의
찬성·반대 놓고 좌우 극한대립
남북분단 고착화시킨 찬·반갈등

주말마다 맞서는 촛불과 태극기
47년 히트가요 현인 ‘신라의 달밤’
2017년 대보름 탄핵 찬·반구호뿐

 

김병길 주필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 1945년 8월15일 함석헌 선생의 이 말은 반가움의 표현이 아니었다. 조선인, 특히 엘리트 집단에 대한 질책이었다. 깊은 잠에 빠져 신사참배하라면 허리가 부러지게 하고, 성을 고치라면 서로 다투어 가며 바꿨던 조선 지도층에 대한 질책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조선인들이 일제 치하보다 더 혹독하고 잔인한 동족상잔의 길로 나가게 되었음을 이후 역사는 보여주게 된다. 

12월 28일 미·소·영 세나라 수도에서 발표된 모스크바 결정은 한국의 신탁통치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를 놓고 우리 국민은 편을 갈라 극단의 ‘찬탁·반탁’ 투쟁을 시작했다. 

12월29일 밤 좌우를 망라한 각 정당과 사회단체 등의 대표 약 200명이 참석한 가운데 회의가 열렸다. 이때만 해도 좌우익 가릴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감정이 울분으로 북받쳐 있었다. 

모스크바 3상회의 의정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이다. 당시 남북은 미·소의 분할통치하에 있었으며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미·소의 합의없이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한국민주당 수석총무였던 송진우는 당시 신탁통치를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는 없다면서 여유를 가지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인 12월30일 새벽 송진우는 괴한들에게 암살당했다. 바로 그날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다. 그 다음날 오후 1시 서울운동장에서 대규모 반탁집회가 열렸다. 신문들은 영하 20도의 강추위를 무릅쓰고 애국일념에 불타는 30만의 시민이 운집했다고 보도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20만이었으니, 그 집계가 맞다면 전 서울시민의 4분의1이 모인 셈이었다. 이날 대회에서는 임시정부 절대지지, 신탁통치 결사반대, 완전자주독립 전취 등을 결의했다. 
해가 바뀌어 1946년은 미군정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전환기였다. 1946년 수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건 역시 신탁통치 문제를 둘러싼 갈등, 아니 전쟁이었다. 바로 이 전쟁이 좌우(左右)갈등을 심화시키면서 상호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남북분단을 고착화로 치닫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1945년 말 반탁투쟁에 있어서는 좌우의 구분이 없었지만, 초기 며칠간 조선공산당의 태도는 선명치 않았고 혼란스러웠다. 내부적으로 모스크바 결의안에 대한 찬반의견이 엇갈렸다.

좌익은 곧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46년 1월3일 조선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갑자기 찬탁으로 돌아서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이는 우익에 의해 ‘민족을 배신한 완전 반역행위’로 규정되었다. 

1946년 1월3일 평양에서는 공산당쪽이 주도한 ‘모스크바 의정서’ 지지 대행진이 벌어졌다. 1월6일부터 북한 전역 대규모군중집회와 함께 모스크바 결정을 반대하는 사람은 반동분자로서 숙청해야 한다는 새로운 지침을 발표했다. 

1946년 1월7일 우익을 대표하는 학생들의 총연합체로서 ‘반탁전국학생연맹’이 결성되었다. 서울운동장에서 1만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반탁시위대회가 열렸다. 

1947년 해방된뒤 두번째 맞는 3·1절 기념식은 46년과 마찬가지로 두 파로 나뉘어 치러졌다. 좌파는 남산공원 우파는 서울운동장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모자라 유혈사태까지 빚어졌다. 기념식을 마치고 시위행진을 벌이던 두 세력이 남대문 근처에서 충돌했다. 양쪽이 격렬한 투석전을 벌여 많은 부상자가 발생했다. 정체불명의 총기 발포로 2명이 사망했다. 부산과 제주도 등에서는 경찰발포로 16명이 죽고 22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47년 10월17일 미국은 유엔총회에 미·소점령군 관할구역에서 유엔 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각각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했다. 남북의 완전한 분단은 사실상 1947년 10월부터 시작됐다. 
주말마다 열리는 박근혜대통령 탄핵 촉구 ‘촛불집회’와 탄핵 반대 ‘태극기 집회’가 극단을 치닫고 있다. 1947년 최고의 히트가요는 중국 천진에서 돌아온 현인이 독특한 창법으로 부른 <신라의 달밤>이었다. 2017년 대보름날에는 달을 보고 소원과 풍년을 빌었다는 전통은 사라지고 탄핵찬반을 외치는 구호만 난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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