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지관리인에 달러 건네며 '묘지 잘 보살펴달라' 부탁도
"2000년대 후반 3∼4차례 찾아"…김정은 권력장악 후엔 발길 끊겨

 

(모스크바=연합뉴스) 모스크바 외곽 공동묘지에 있는 성혜림의 묘.

최근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당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이복형 김정남(46)이 생전에 러시아 모스크바 외곽 공동묘지에 있는 생모 성혜림의 묘를 여러 차례 방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조용조용히 묘지를 다녀갔던 김정남은 한번은 관리실에 들러 묘지를 청소하는 인부들에게 달러를 쥐여주며 자기 어머니 성씨의 묘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고 한 관리원이 전했다.

65세의 나이로 2002년 숨진 성씨의 무덤은 지금도 모스크바 서쪽 외곽에 있는 '트로예쿠롭스코예' 국립 공동묘지에 남아있다. 이 묘지는 모스크바 시내에 있는 노보데비치 국립묘지의 분지(分地) 격으로 옛 소련과 러시아의 고위 정치인, 고급 장성, 유명 작가와 배우 등이 묻혀있다. 원칙적으로 외국인이 묻힐 수 없는 곳이지만 성씨가 사망한 뒤 북한 당국이 "시신을 본국으로 송환할 수 없으니 북한의 국모(國母) 수준으로 안치해 달라”고 러시아 측에 요청해 이곳에 묘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묘 앞에 세워진 검은색 대리석 묘비에는 한글로 ‘성혜림의 묘’라는 비명과 생존 시기(1937.1.24-2002.5.18)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묘주 김정남'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다.

현지 소식통들에 따르면 김정남은 모친이 사망한 지 3년 뒤인 2005년 묘지를 찾아와 직접 묘비를 세웠다고 한다.

김정남은 이후로도 2~3 차례 이상 묘지를 찾아왔었다고 익명을 요구한 묘지 관리원이 현지 리아노보스티 통신에 전했다.

이 관리원은 "김정남이 항상 비공식적으로 1~2명의 보좌관을 데리고 조용히 묘지를 다녀갔으며 자신의 방문을 외부에 잘 알리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그러던 김정남이 "한번은 관리실에 들러 성씨 묘 관리에 문제가 없는지 물었고, 또 한 번은 묘지를 청소하는 인부들에게 미화 200달러(약 20만 원)를 주며 관리를 부탁했다"고 이 관리원은 전했다.

김정남이 마지막으로 성씨의 묘를 찾은 것은 2009년 10월로 알려져 있다. 이후로는 이복동생인 김정은의 권력 승계가 굳어져 가면서 신변의 위협을 느껴 모스크바를 방문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현지 소식통은 설명했다.

2008년까지 성씨 묘를 주기적으로 관리하던 북한 관리들도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굳어져 가면서 발길을 끊었고 이후 묘지는 거의 방치되다시피 했다.

연합뉴스가 15일 찾았을 때도 성씨의 묘는 오랫동안 관리가 안된 모습 그대로였다.

묘터와 묘 봉분에는 흰 눈이 두껍게 쌓여 있고 묘비 앞에는 누군가가 남겨 놓은 흰색 국화가 눈 위에서 말라가고 있었다. 아들의 죽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성씨는 한겨울의 차가운 고요 속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모스크바 외곽 공동묘지에 있는 성혜림의 묘.

1937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성혜림은 서울 풍문여중을 다니던 도중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어머니를 따라 월북했다. 이후 평양 제3여자중학교를 거쳐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한 뒤 영화배우가 됐다.

19살의 나이에 월북작가 리기영의 장남인 리평과 결혼해 딸까지 낳고 뛰어난 미모와 특유의 분위기로 북한 최고의 여배우로 활동하던 중 영화광인 김정일의 눈에 들어 남편과 이혼해야 했다.

32살의 나이인 1969년부터 다섯 살 연하의 김정일과 동거를 시작한 그는 1971년 아들 김정남을 낳았지만 김일성은 이혼한 경력이 있는 그를 며느리로 인정하지 않았다.

성씨는 김정일이 두 번째 여자인 김영숙과 결혼한 뒤인 1974년 고모인 김경희에 의해 쫓겨나 세 살 난 아들 김정남을 남겨두고 모스크바로 떠나와야 했다. 김정남은 성씨의 어머니와 언니 성혜랑이 맡아 키웠다.

김정일은 이후 세 번째 여자인 재일동포 출신 무용수 고용희와의 사이에서 김정철과 김정은을 얻었다.

김정일의 사랑을 잃고 아들마저 고국에 버려둔 채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외롭게 살던 성씨는 결국 유선암이란 병을 얻었고 모스크바 병원에서 치료를 받다 2002년 5월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성씨가 평생을 그리워했을 아들 김정남의 말년과 죽음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권력 승계 과정에서 김정은에게 밀려나 중국과 마카오 등을 떠돌던 김정남은 지난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갑자기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되던 중 사망했다.

마카오행 항공편의 탑승 수속을 밟기 위해 셀프체크인 기기를 사용하던 중 신원을 알 수 없는 2명의 여성에게 독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황태자'로 주목받다 권력 승계에서 밀려나 타국을 떠돌다 숨진 김정남의 삶이 어머니의 굴곡진 삶을 닮았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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