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구산 너럭바위가 원조 ‘반구대’
대곡박물관 ‘역주 집청정 시집’
언양서 유배생활 정몽주 등
선비 260명 한시 406수 수록
겸재 정선도 반구대 풍경 화폭에

 

울산하면 ‘고래도시’와 ‘처용설화’가 연상된다. 그렇다고 고래나 처용이 울산을 대표하는 정체성이라 단정할 순 없다. 학(鶴)은 최근 수년간 울산의 역사와 정신을 대표할 아이콘으로 지목돼왔다. 학성공원과 학산동, 무학산 등 울산은 ‘학의 고장’이라 할 만큼 학과 관련한 지명이 산재해있다. <경상도지리지(1425년)>에는 서기 901년에 천신이 쌍학을 타고 계변(신라 때 울산의 지명)에 내려앉았다는 기록도 나온다. 역사 속에 깃든 울산과 학의 인연법에 대해 살펴보고, 학이 과연 울산을 상징할 아이콘이 될 수 있는지 진단해본다.    

 

‘원조 반구대’는 국보인 반구대 암각화에서 대곡천을 따라 1km 남짓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반구산 끄트머리에 펼쳐져있는 너럭바위를 말한다. 대곡천을 끼고 형성된 산의 모양새가 ‘머리를 내밀고 넙죽 엎드린 거북’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반구산(盤龜山)인데, 원조 반구대는 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한다. (울산대곡박물관 제공)

태화강 상류인 울산 울주군 언양읍 대곡천 유역 기암괴석을 화폭 삼은 선사시대 인들. 

고래잡이에 나선 7,000년 전 조상들의 수렵활동이 대곡천 협곡을 병풍처럼 둘러싼 바위절벽에 잘 새겨져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얘기다. 

이 암각화는 원효대사의 발자취를 쫓던 동국대학교 불교사적조사단에 의해 197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발견됐고, 1995년에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면서 널리 알려졌다. 

놀라운 건 ‘원조 반구대’가 엄연히 따로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반구대 석벽에 ‘盤龜(반구)’라고 크게 음각된 한자와 학(鶴). (울산대곡박물관 제공)

◆‘원조 반구대’ 선사유적 암각화 발견 후 잊혀지다 

국보인 암각화에서 대곡천을 따라 1km 남짓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반구산 끄트머리에 너럭바위가 나온다. 

대곡천을 끼고 형성된 산의 모양새가 ‘머리를 내밀고 넙죽 엎드린 거북’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반구산(盤龜山)이다. 이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는 곳에 편편하게 펼쳐진 너럭바위가 바로 암각화가 발견되기 수백 년 전부터 ‘반구대’라 불린 곳이다. 집청정 정자 맞은편이다.  

여기 반구대 절벽에는 ‘盤龜(반구)’라는 한자가 크게 음각돼있기도 하다.   

고려 우왕 때 언양현 요도(寥島·지금의 어음리)에 유배된 포은 정몽주가 반구대에 올라 주변 경치를 즐기며 시를 읊고 시름을 달랬다 해서 ‘포은대(圃隱臺)’라고도 불렸다. 이후 포은의 충절을 숭모하던 조선 선비와 시인묵객들의 유람길로 유명세를 떨쳤다.    

하지만 선사유적인 대곡리 암각화에 ‘반구대 암각화’라는 명칭이 붙여지면서 정작 원조 반구대는 세간의 관심에서 차차 잊혀져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전개됐다. 

 

반구대 집청정.

◆반구대, 포은의 한시·겸재의 화첩에 들다  

언양은 고려와 조선시대 귀양지로도 활용됐다 한다. 

포은 정몽주는 조선의 초대 왕 이성계의 아들 방원이 ‘하여가(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로 자신의 마음을 떠 보려하자, ‘단심가(이 몸이 죽고 죽어…)’로 답하며 망국에 대한 충절을 지킨 인물이다.   

고려 우왕 1년인 1376년에는 ‘친원배명(명나라를 배척하고 원나라와 친하게 지내자는 정책)’ 정책에 반대하다 언양에 유배돼 1년 남짓 생활했다. 

정몽주의 <포은집>에는 선생이 중구일(重九日·음력 9월9일)에 반구대에 올라 읊은 한시가 나온다. 

나그네의 마음이 오늘 더욱 쓸쓸한데 
장기 어린 바닷가에서 물에 나아가고 산에 오르네. 
뱃속에는 글이 있어서 문득 나라를 그르쳤지만 
주머니에는 약이 없으니 나이를 늘릴 수 있으랴? 
용은 저무는 한 해가 근심스러워 깊은 골짜기에 숨고 
학은 갠 가을이 기꺼워 푸른 하늘로 오르네. 
손으로 누런 국화를 꺾고 잠시 그저 한 번 취하는데 
옥 같은 님은 구름과 안개 너머에 있네. 
 

포은이 언양에서 유배생활을 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반구대(포은대)는 조선시대 사대부나 선비,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는 유람 코스가 됐다. 실제 울산대곡박물관이 지난해 12월 발간한 <역주 집청정 시집>에는 반구대를 다녀간 선비 260명이 지은 한시 406수가 수록돼있다.  

반구대(포은대)가 유명해지자 1712년, 조선 숙종은 포은 정몽주와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 선생을 배향하는 반고서원(반구서원)을 건립했다. 

그 이듬해에는 운암 최신기가 반구대를 마주보는 자리에 집청정 정자를 세웠다. 운암은 영조 때 병조판서를 지낸 최진립의 증손인데, 포은이 시를 남긴 곳으로 이름난 풍광이 천고(千古)에 깊이 감춰진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정자를 지은 거다. 

이후 반구대는 반고서원, 집청정과 함께 대곡천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 실제 언양현(언양의 옛 지명)의 명소로 북쪽은 반구대(포은대), 남쪽은 작천정이라는 뜻의 ‘북구남작(北龜南酌)’이라는 말까지 생겼을 정도다. 

겸재 정선도 반구대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화첩 <교남명승첩>에는 반구대(포은대) 너럭바위 위에 갓을 쓴 선비들과 대곡천 건너 언덕에 여러 채의 가옥, 집청정으로 보이는 격조 있는 정자가 그려져 있다. 

◆학, 조선선비 유람길 반구대 절벽에 깃들다  

반구대(포은대) 절벽에 음각된 ‘반구’라는 한자 옆에 신선의 기품을 가졌다는 학(鶴)과 ‘학소대(鶴巢臺)’라는 글자가 새겨져있어 눈길을 끈다. 

학은 순우리말로는 두루미인데, 반구대에 새겨진 학은 모두 두 마리다. 한 마리는 한 다리로 서서 고개를 돌려 긴 부리로 깃을 고르고 있다. 다른 한 마리는 날개를 접은 채 목을 길게 뻗어 하늘을 보고 있어 ‘학수고대(鶴首苦待)’라는 사자성어를 절로 떠올리게 한다. 이 학 그림과 ‘반구’라는 한자는 운암이 집청정을 건립한 이듬해 직접 새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과거 반구대에는 정말 학이 살았던 걸까.

<역주 집청정 시집>에 수록된 한시에는 반구대 학을 노래한 한시가 상당히 많다.  
   
현풍 사람 눌제 곽전(1839~1911년)은 반구대 바위에 그려진 학 그림과 주변 경치를 구경하고 ‘화학암(畵鶴巖)’이라는 시를 남겼다.

‘한 조각 기암에 그려진 좋은 그림은 
반구대 위 맑은 샘솟는 물가에 있도다. 
인연이 닿은 꿈같은 이 몸은 요양 땅에 온 듯하고 
꿈결 같은 정취는 적벽에 있는 것 같네. 
계곡에 비친 맑은 달은 공중에 뜬 것과 같고 
아침의 붉은 놀은 불로 약같이 젖어 맑아지는 정신이라. 
신선놀음 끝나 저녁에 돌아가고져 하는데 
맑은 물가 큰 소나무가 말없이 가까이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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