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는 휘발성과 가연성을 가진 무색 액체를 함유하고 있어 술의 원료가 된다. 에너지원으로 쓸 수 있는 에탄올 추출이 가능해 한 때 세계적 곡물 파동을 일으킨 곡식이 옥수수였다. 남미가 원산지인 옥수수는 벼, 밀과 함께 세계 3대 농작물로 꼽혀왔다. 

옥수수 박사로 유명한 울산 강동출신 김순권 한동대 석좌교수는 1974년 미국하와이주립대학에서 옥수수 내병성육종에 관한 연구로 농학박사가 됐다. 귀국후 76년 병충해에 강하고 수확량이 많은 옥수수 종자 ‘수원 19·20·21호’를 개발 했으며 1970년대 농가 속득 3배 향상을 이끌어 낸 작물이 됐다. ‘강냉이 19’로 불리는 ‘수원 19호’는 현재 북한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작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아프리카 나이지리아로 건너간 김 박사는 풍토병에 시달리며 17년간 ‘악마의 풀’로 불리는 잡초 ‘스트라이가(Striga)’와 공생할 수 있는 옥수수를 개발했다. 옥수수를 해마다 1백만t 이상 수입해오던 나이지리아는 이후 옥수수 수출국이 됐다. 김 박사는 1992년 이후 다섯차례나 노벨상 생리의학부문 수상 후보로 올랐다.

1995년 말 귀국한 김 박사는 정주영 현대회장의 지원으로 국제옥수수재단을 설립, 김대중 정부 이후 슈퍼 옥수수 종자 개발을 위해 6년에 걸쳐 북한을 57차례 방문했다. 370여 일을 북한에 머물며 12개 품종의 옥수수를 보급해 북한 식량문제 해소에 앞장섰다. 

지구촌에서 그는 식량부족이라는 가장 절실하고 원초적인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수억 명의 빈민에게 소중한 존재다. 

“나는 옥수수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자부한다. 옥수수를 통해 전 세계 30억 인구의 삶의 질을 변화시킬 것”이라는 김 박사는 다른사람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보다 자신의 길을 개척해왔다.

그가 3월 23일 울산시의회 프레스센터에 나타나 “대통령이 되면 3년 이내 통일(중립국)을 이루고, 3년 이후 깨끗이 물러나겠다”며 깜짝 출사표를 던져 놀라게 했다. 건곤일척(乾坤一擲)의 국가 위기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옥수수 박사’까지 나서게 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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