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하
시인

걷기는 세계를 느끼고 나를 알아가는 최상의 문화 중 하나다. 걷기는 일상으로부터 잠시 탈출이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내려놓는 자유로운 경험이다. 침침해진 두 눈 속에서 나뭇잎이 피어나고 꽃이 피어난다. 음울해진 두 귀는 물소리와 새의 지저귐을 흡수하면서 무궁무진한 감각과 관능에 대한 지식을 확대해간다.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한 동시에 하루를 반성하기도 한다. 또 다른 세계가 나를 확장해가는 통로다. 

아름다운 자연은 지극히 편안해서 모든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민주적이다. 어떻게 생각하며 걷든 어떤 결과이든 어떻게 글로 남기든 자연으로 가는 가슴은 항상 적극적이다. 아버지 어머니를 만나고 형제를 만나고 스승과 제자를 만나고 친구들을 즐겁게 만나는 것 같아 괜히 어깨가 으쓱해진다.

당신에게 걷기 좋은 장소는 어떤 곳이 좋을까? 고민하기도 전에 누군가의 두 발은 벌써 어느 곳을 걷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가까이에서부터. 사실 대한민국은 사계절이 뚜렷해서 발길 닿는 곳이 모두 명소다. 심지어 한 지인은 매일같이 같은 장소를 되풀이 걷는데도 하루하루 자신이 달라지는 모습을 발견한다고 했다. 마치 특별한 옷이 입혀진 것처럼 거울 속 자신이 건강해졌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매일매일 자연과 색다른 마음으로 대화를 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걷기의 세계는 그야말로 푸른 미래를 불러오게 하는 묘한 힘을 가졌다. 빠르게 달리지 못하는 자신이 가끔 슬플 때도 있지만 두 팔은 끈질기게 흔들리고 머리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끊임없는 생각은 제2의 나를 탄생하게 한다. 기분이 좋아지면 산책 도중 소중한 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어제의 고민을, 삼십 분 전 통증을 말끔히 털어내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고민하기도 한다. 나무와 식물이 우거진 수목원, 고향을 닮은 마을, 아니면 파도가 철썩이는 바닷가, 유난히 휘어진 길, 굵고 짧은 길, 아픈 역사가 흐르고 있는 곳 등을 떠올리다가 결국 몸과 시간이 허락되는 곳을 선택한다. 

며칠 전, 대구 ‘수성못’에 다녀왔다. 아들을 만난 후 귀갓길에 잠시 들린 곳이다. 마침 벚꽃이 진 후라 한적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넘쳐났다. 친절한 주차 요원의 안내로 수성랜드 내(內)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둘레길에 올랐다. 대체로 수성못은 맑았다. 오리배를 타는 연인들 그리고 큰 왕버들 두 그루 잎의 세계가 감탄을 자아내게 했다. 멀리 둥지섬 앞, 고니가 헤엄치는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족 단위, 젊은 연인들, 대학생들이 마치 윤슬 같았다. 사실 그날 대부분은 연인들과 어린 아이들이었다. 둘레길 근처 이국적인 카페와 레스토랑의 영향이 큰 것 같았다. 

‘수성못’은 일제강점기 당시 수성들이다. 수성들(지금의 들안길먹거리타운 일대)은 신천의 물로 농사를 지은 대구 퇴고의 옥터였다고 한다. 1923년 대구 상수도 확장공사가 결정되면서 수성들은 농업용수가 턱없이 부족하였고, 이에 1924년 수성수리조합을 구성, 1927년 지금의 수성못을 완공하게 되었다. 수성못은 태어난 지 100여 년이 다 되어가는 인공호수이며, 2013년 생태복원사업을 통해 대구를 대표하는 문화휴식처로 거듭나고 있었다.

수성못 둘레는 2㎞이다. 마사토를 깔아놔서 그런지 걷는 내내 발바닥이 편안했다. 수성못 관광안내소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가려는 찰나 이상화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새겨진 대형 돌비석이 눈에 번쩍 띄었다. 평소에 내가 좋아하는 시인의 시, 한 편을 다시 읽노라니 가슴 한 쪽이 뭉클했다. “진정 나에게는 언제 봄이 오려는가?” 저기 저 아름다운 모습으로 걷고 있는 여인들의 뒷모습은 봄인 듯한데, 내 오른 쪽 발가락은 여전히 오른 쪽을 고집했다. 오른쪽 햇살에 의지해 더 깊숙한 통로로 걸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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