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곡마을은 외형적으로 볼 때, 너른 들을 가진 전형적인 농촌이다. 그런데 이 들 아래에는 특이한 돌이 있는데, 주민들은 이 돌을 ‘칼돌’이라 부른다. 어찌 보면 자갈돌 같기도 하지만,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자갈돌보다 더 날카롭다. 1970년대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마을에 널려있는 이 돌을 판매하려고 한 적도 있지만, 결국 자갈돌로도 쓸 수 없었다. 이 돌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현재는 객토되어 이 돌을 눈으로 쉽게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물이 가득 담긴 논에 들어가 보면 이 돌이 왜 칼돌로 불리는지 금세 알 수 있다.

달곡들 아래 날카로운 ‘칼돌’
물을 땅 속으로 흐르게 해
척박한 환경 논농사 힘들어
밭농사 위주에 생활용수난
달곡지·사당골·큰골저수지 등
1930년부터 저수지 축조
달곡마을에 농업용수 공급
1975년 이후부터 본격 논농사
다른 마을 보다 조직·언어 단순
1970년대 상수도 보급 전까지 
마을에 개인·공동우물 파고
다른 곳서 ‘물당기기’ 도

 

◆‘칼돌’을 극복하라! 저수지 축조

달곡들 약 40~50cm 아래에는 발을 찌르는 날카로운 돌이 만나게 되는 데, 이 돌이 바로 칼돌이다. 이 돌은 들을 척박하게 했으며, 물을 땅속으로 흐르게 해 오랜 기간 마을에서는 논농사가 이뤄지지 않았고, 밭농사도 그다지 잘 안 됐다. 심지어 생활용수도 부족했다. 그러나 이 돌은 필자가 달곡마을의 생업과 민속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달곡마을에서는 칼돌 때문에 물이 땅속으로 흘러, 물을 가두는 일이 무척이나 중요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저수지 축조 공사가 시작됐으며 1930년 달곡지, 1965년 사당골저수지, 1975년 큰골저수지를 완공돼 달곡마을에 농업용수를 공급했었다. 2016년 10월 태풍으로 사당골저수지가 붕괴하고, 윗마을에 있는 달곡지는 농업용수로 활용이 중단된 상태이지만, 자연마을에서 긴 시간동안 3개의 대규모 저수지가 관리된 점은 이례적이다. 

 

달곡마을에서 발견된 ‘칼돌’로 불리는 셰일.

◆‘큰골저수지’가 ‘정자저수지’로

세 개의 저수지 중 1975년에 완공된 큰골저수지의 행정명칭은 정자저수지이다. 일제강점기 달곡지가 만들어지고, 큰골저수지도 둑을 막는 공사가 진행됐다. 당시 큰골저수지 둑의 위치는 현재의 둑보다 골 위쪽으로 더 올라간다. 그런데, 저수지에 물이 저장되지 않아 공사는 곧 중단하게 됐다. 1965년 사당골저수지가 만들어지고, 1970년대 큰골저수지를 다시 만들면서 저수량을 확보하기 위해 현재의 위치로 둑이 조정했다. 그런데 예산이 애초보다 3배 이상 늘었고, 둑 공사도 몇 번의 실패를 반복했다. 이때 늘어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묘수(妙手)가 저수지를 통해서 물을 공급받는 농지의 면적인 몽리(물댈)면적을 늘려야 했다. 큰골저수지는 실제 정자동까지 농수가 공급되지 않았지만, 정자동까지 공급될 예정이라고 해서 이름을 정자저수지로 바뀌게 됐다. 여전히 이 저수지의 물은 달곡마을에 한정됐으며, 마을 주민들도 정자저수지로 부르지 않고 큰골저수지로 부른다. 농수도 공급받지 못한 채 물세만 낸 마을에서는 속상할 일이다.

◆‘칼돌’이 현재 농사에 미친 영향
오늘날 대부분 농촌에서 기계화가 진행됨에 따라 노동 조직은 약화됐지만, 일반적으로 과거의 행위에 관해서 구술로 채록되며, 이와 관련 증거물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달곡마을에서는 새마을 운동과 경지정리 사업 등을 경험한 세대가 여전히 존재함에도 노동조직에 관한 구술이 분명하지 않았다. 농촌에서 노동조직은 일시에 많은 노동력이 집중되는 벼농사의 단계에 따라 발달한다. 즉, 달곡마을에서는 칼돌 때문에 오랜 기간 논농사가 이루어지지 못해 노동조직이 발달하지 못했다. 또한, 달곡마을에서는 벼농사에 사용하는 농사언어도 단순하다. 한 가지 예로 벼농사에서 논을 가는 행위도 각 단계에 따라 마른 논 갈기, 무논 갈기, 논 삶기, 써레질, 써레번지질 등 다양하지만, 달곡마을에서는 이 모든 행위가 ‘논 두드리기’로 통용된다. 즉, 마을에서 어느 정도 기계화가 이루어진 1975년 이후 논농사가 늘어남에 따라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논농사 언어가 발달하지 못했다.

 

1975년 완공된 큰골저수지. 큰골저수지 완공 이후 달곡들이 만들어져 현재의 생업환경을 만들었다.

◆간절한 물 당기기

달곡마을에서는 남부지방 전통가옥의 형태인 대청이 너른 일자집에서 아직도 우물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이 우물은 개인 집뿐만 아니라 인근 서너 집을 묶어서 공동우물을 만들었으며, 자연마을 단위의 공동우물까지 곳곳에서 확인된다. 칼돌 때문에 생활용수조차 부족했던 달곡마을에서는 1970년대까지 공동우물을 파거나 날이 가물어 우물이 마르면 물 당기기 행위가 이루어졌다. 물 당기기는 마을 단위 또는 인근 몇 개의 마을에서 주민들이 공동으로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는 곳에서 우물까지 물을 당겨오는 기원 행위이다. 비록 1970년대 상수도가 보급되면서 달곡마을의 물 당기기는 전승이 단절됐지만, 이 마을의 물 당기기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다른 마을의 물 당기기 행위보다 더 간절했을 것이다. 

물 당기기는 가뭄과 관련한 것으로 정기적 또는 세시적인 성격을 갖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물 당기기 행위가 전승되지 못한 원인이다. 더욱이 마을에 상수도가 보급된 이후 물을 기원하던 물 당기기는 자연스럽게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달곡마을에서는 1988년에 물 당기기를 재현하고, 그 영상을 기록화로 남겨놓았다. 그러나 재현된 물 당기기는 동제와 혼재돼 그 실체를 명확하게 확인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달곡의 물 당기기 실체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달곡마을은 칼돌 때문에 지반이 튼튼해 물을 가득 담긴 논에 적재함을 연결한 경운기가 들어올 수 있다.

☞칼돌이란?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 의하면 달곡마을의 주요 암석은 이암(mudstone, 泥岩)과 셰일(shale) 계열이다. 달곡마을에서 칼돌로 부르는 암석은 셰일로, 이 암석은 이암보다 더 잘 쪼개지며, 유독 달곡마을에서만 확인되며, 주변 마을에서는 잘 확인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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