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명기’ 울산 태생 전화앵
 망국의 한 품고 왕조 절개 지켜
 동도 열박령 묻혀서도 우국충정

 

임 석시인·작가들의 숲 대표

전화앵(囀花鶯)은 신라의 명기(名妓)다. 울산 태생으로 신라 효공왕에서 고려 성종 시대의 인물로 춤과 노래 솜씨는 물론, 예(藝)와 기(妓)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가무에 뛰어나고 자태 고운 어느 여자가 관기에 뽑혀 성내에서 활동하다보니 시(詩), 서(書), 화(畵)를 배우면서 학문을 넓혀나갔고, 뛰어난 춤 솜씨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빼올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시 기녀에게는 성이 없었기에 꽃 같은 아름다움과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여인이라 해 ‘전화앵’이란 화류계 이름을 지어 불렀을 것이다. 

그녀는 주변 나라에게 신라가 망하는 것을 보면서 망국의 한을 품고, 신라 왕조의 절개를 지켜 주위로부터 많은 추앙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나라 역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기녀로 고려 문인 김극기(金克己)가 쓴 시에는 그녀를 ‘무협신녀'로 표현했고, ‘월투가(月偸歌·달을 훔치도록 아름다운 노래)와 운학무(雲鶴舞)의 여인'이라고도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경주부 고적조 열박咽薄령(백운산)편에, ‘열박령은 경주 남쪽 30리(지금은 활천리)에 있고, 동도(東都·경주)의 명기(名妓) 전화앵이 묻힌 곳’이라고 기록돼 있다. 
고려시절에는 서라벌을 동도(東都)라 불렀고 평양을 서도(西都)라 불렀는데 동도의 명기란 글이 그 당시에 적혀 있음은 고려 전국에 전화앵의 명성이 자자했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이곳은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이 백운산에서 수련하면서 도인을 만나 비법을 전수받아 통일의 기틀을 구상했다는 백운바위가 보이고 신라의 화랑들이 마병산에서 기마술과 심신을 단련하며 충절과 신의를 키우며 덕목(德目)을 닦았다던 흔적이 아직 그대로 남아 열박령  전화앵 묘를 지켜보고 있었을 것이다. 

며칠 전에 이장된 전화앵 묘를 찾아갔다. 방치해 잡풀에 덮여 형체도 알아볼 수 없던 무덤이 왕의 능만큼 커져 있었다. 원래 장소인지는 확실치 아니하나 예부터 전해 온 기생 묘 하나가 기생왕릉이 돼 다시 나타난 것이다. 

    
    흰 천에 한을 실어 밤하늘 아우르네
    날을 듯 너울대는 무명수건 한 자락
    열박제 휘감아 도는 강강술래 내 사랑

    설익은 불빛덩이 치마폭에 감쌌다가
    불새 되어 훨훨 나는 기녀의 속앓이로
    달빛에 쓰러진 고요 활천리에 흐르네

    목숨빛 정조 절개 머리맡에 내려놓고
    해어화(解語花) 봄을 안고 나 이곳에 왔노라
    아득한 시공의 불꽃 그리움을 안고 돈다

    붉은 설매 다북다북 피어나는 한 겨울밤
    내면의 채찍질로 그림자를 띄워놓고
    고통과 절망 접어서 다가서는 전화앵

                     -못다 이룬 꿈, 전화앵-

괴로움도 두려움도 만백성 근심걱정도 깊어가는 신라의 밤, 당당하지 못한 신라 군사 항복하는 군대가 활천리 30리 길을 매웠다고 한다. 힘없는 여자도 절개 지켜 나라에 힘을 보탰는데 당당하지 못한 통일신라 군사, 망국의 대부들, 너희들은 어서 남의 나라로 가거라. 너희들이야 말로 창녀보다도 더욱 절조가 없는 신라 군인이 아니었던가.  전화앵은 목소리를 높여, ‘나라를 잃은 자는 천하에 제 무덤도 못가진다' 는 것을 잊지 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강한 대국의 군사들이 작은 나라를 삼기 듯. 천년의 종사가 갑자기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신라의 화려한 문물들이 저 멀리 북쪽 송학으로 실려 갈 때, 홀로 옛 도읍지에 남아 화려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그녀는 경주에서 남쪽으로 30리 떨어진 열박령(悅朴嶺)으로 자리를 옮겨 애달픈 학이 돼 다시 우국충정으로 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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