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족 향한 무차별 발포의 기억
- 줄서던 시민들, 혈액은 남아 돌았다
- 병원에까지 기관단총 발포 
- 광주만의 아픔일 땐, 2차 피해

■ 방송 :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FM 98.1 (07:30~09:00)
■ 진행 : 김현정 앵커
■ 대담 : 정성수(전남대병원 교수, 5·18 당시 응급실 인턴)

 

이제는 노래도 부를 수 있게 됐고 1만 명이 마치 축제처럼 행사를 합니다 기분 좋게 전해 드렸습니다만 사실 5.18은 큰 아픔입니다. 큰 상처입니다. 아직도 아물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5.18 당시 광주의 상황을 담은 생생한 증언록이 하나 나와서 그 증언록을 쓰신 분을 연결해 보려고 하는데요. 당시에 광주 전남대 병원의 의사, 간호사 28명의 증언을 모은 증언록이 나온 겁니다. 당시 계엄군의 공격을 받고 다친 수많은 시민들이 모였던 곳이 바로 전남대병원이죠. 제목이 '5·18 10일간의 야전병원'입니다, 야전병원. 도대체 어땠기에 전쟁 중도 아닌데 야전병원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요? 지금은 전남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로 계신 분이세요. 정성수 교수 증언자 직접 만나보죠. 정성수 교수님, 나와 계세요.  

◆ 정성수> 안녕하십니까. 

◇ 김현정> 지금은 전대 의대 교수신 거죠? 

◆ 정성수> 네, 그렇습니다. 

◇ 김현정> 1980년 그때는 뭘로 근무하셨습니까? 

◆ 정성수> 80년 5월 1일부터 전남대학교 병원 응급 인턴으로 근무하는데 제 스케줄이 5월 3일부터 6주간을 응급실을 담당하게 스케줄이 짜 있었습니다. 

◇ 김현정> 응급실에서 인턴으로. 5월 1일부터 시작했으니까 그야말로 새내기 인턴이었네요. 

◆ 정성수> 네네. 그렇습니다. 

◇ 김현정> 자, 37년 전인 1980년 5월 18일 그날 아침으로 한번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날 전남대 앞에서는 전두환 정권의 계엄령 철폐를 요구하는 시위가 한창 벌어졌는데 그때 선생님은 그때도 응급실에 계셨던 거잖아요? 학교 병원. 

◆ 정성수> 네, 그렇습니다. 

◇ 김현정> 그런데 어떤 일이, 어떤 일이 벌어진 겁니까, 병원에서? 

◆ 정성수> 18일 아침부터 곤봉에 맞아가지고 구타된 환자들이 오기 시작합니다. 조금 있다가는 총에… (당시) 착검을 한 상태였거든요. 그래서 진압하려고 저희들이 달려들면 시민들이 물러날 거 아닙니까? 남자들은 좀 걸음이 빠르고 여학생들은 걸음이 좀 늦기 때문에 여학생들이 주로 등이 찔려가지고 오기 시작합니다. 

◇ 김현정> 등이 찔려서? 그럼 도망가는 사람을 찔렀다는 얘기잖아요, 뒤를? 
 

(사진=자료사진)

◆ 정성수> 그렇죠. 그리고 19일 이후 발포 이후 상황은, 그야말로 전쟁 상태에 돌입하게 됩니다.

◇ 김현정> 전쟁 상태? 발포가 시작된 5월 19일부터. 응급실에 환자가 수도 없이 몰려들었다면서요? 

◆ 정성수> 의식이 없는 환자들이 굉장히 많이 옵니다. 그런데 누구인지도 모르고. 

◇ 김현정> 의식이 없으니까.

◆ 정성수> 네네. 그래서 학동에서 발견됐다면 '학동남1', 검정색 티를 입고 있었으면 '검정티1', 그런 식으로 의무 기록을 해 왔고요. 또 환자도 워낙 많기 때문에 원무과 앞에 접수대에는 보통 넓지 않습니까? 거기서 치료를 하게 됩니다. 야전병원 그 상황이었죠. 

◇ 김현정> 전쟁통.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제일 기억에 남는 환자. 누구였을까요? 

◆ 정성수> 너무 비참한 상황인데. 어떤 한 분이 트럭에다가 자기 부인하고 아기하고 싣고 왔더라고요. 제 기억으로는 부인이 총에 맞아 죽고 아들이 다친 걸로 기억을 하고 있는데. 

◇ 김현정> 아니, 데리고 왔는데. 태워가지고 왔는데 이미 사망한 상태였어요? 

◆ 정성수> 네네. 어떻게 됐냐고 물어봤습니다. 그랬더니 처갓집이 담양이랍니다. 그래서 자기 차를 몰고 담양 처갓집으로 가려고. 

◇ 김현정> 피신하려고 하는데. 

◆ 정성수> 네네. 갔는데 중계선에서 육군 대위랍니다. 안 됩니다. 다시 돌아가십시오. 그래서 차를 돌려가지고 막 출발하려는데 뒤에서 그대로 총을 쏴버려서. 

◇ 김현정> 아니, 가지 말라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해서 차를 돌리는데 왜 돌리는 차한테 대고 발포를 했답니까? 

◆ 정성수> 철천지 원수 대하듯이 무차별 사격이거든요. 그 건만 아니고 수없이 많은 일들이 생겼기 때문에요. 

◇ 김현정> 수없이 많은… 맞아요. 그런데 환자들이 그렇게 쉴 틈 없이 몰려들면 그것도 중상 환자들이 쉴 틈 없이 몰려들면 장소뿐 아니라 인력도 약품도 굉장히 부족했겠는데요. 

◆ 정성수> 가장 힘들었던 것이 수액이었습니다. 

◇ 김현정> 수액? 

◆ 정성수> 우리가 보통 말하는 링거라고 많이 하지 않습니까? 

◇ 김현정> 일단 환자가 가면 그것부터 꼽잖아요. 

◆ 정성수> 그런데 광주 외곽이 전부 차단이 돼버리니까 약품이 공급이 안 돼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갑자기 많은 물량의 수액이 내려와요, 응급실로. 그래서 '이 수액이 어디서 왔다냐' 그랬더니 입원해 있던 환자. 그 환자들이 자기는 이제 못 맞겠다. 총 맞아서 오고 다친 시민들 주라 해가지고 그 플로이드가 한꺼번에 다 내려오게 됩니다. 

◇ 김현정> 수액 양보네요, 수액 양보. 

◆ 정성수> 네, 그리고 수혈은, 혈액은 문제가 안 됐던 게 저희들이 혈액이 많이 부족한 상태라고 해서 시민군들이 마이크를 통해서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혈액이 부족합니다 방송을 하니까 헌혈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줄을 서가지고. 

◇ 김현정> 내 피를 가져가시오, 수술할 때 쓰시오. 

◆ 정성수> 다 일이 끝나고 나서 피가 굉장히 많이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오히려. 

◇ 김현정> 오히려, 오히려. 

◆ 정성수> 그런 것을 보면서 아, 이게 한마음 한뜻의 힘이구나 느꼈습니다. 

◇ 김현정> 그 난리 속에서도 시민들은 서로를 아끼고 보호하고 감싸주고. 이거 보면서는 정말 전율이 오르셨을 것 같은데요. 

◆ 정성수> 네네. 

◇ 김현정> 그렇죠, 그렇죠.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에서 인턴을 했던. 그래서 그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이번에 기술한 전남대병원 정성수 교수 지금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진압이 정말 잔인했던 건 병원에 대해서도 공격을 가했다는 거예요. 병원 건물을 향해서. 아니, 전쟁통에도 병원은 못 건드리게 돼 있는 건데 어떻게 병원에 대해서 공격이 있었습니까? 
 

1980년 5.18 당시 군 헬기가 전일빌딩 주변을 비행하고 있다. (사진=5.18기념재단 제공)

◆ 정성수> 총격은 크게 두 가지 타입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요. 첫 번째는 공수부대가 우리 병원에 발포를 하는 것은. 자기들이 광주에서 철수를 하면서 거의 2층 높이로 해서 기관단총 비슷하게 완전히 총을 쏘면서 가거든요. 

◇ 김현정> 기관단총이라면 두두두두 쏘는 그 총? 

◆ 정성수> 네, 그렇습니다. 

◇ 김현정> 병원을 향해서 발포하면서 사라졌다고요? 

◆ 정성수> 양쪽으로. 그 길이 화순으로 가는 길에 저희 병원이 있기 때문에 전 건물에다가 대놓고 발포하면서 가는 거죠. 

◇ 김현정> 왜요? 왜 병원을 향해서? 

◆ 정성수> 모르겠습니다. 자기들의 생명에 위협을 느껴서 그랬지 않았겠는가 하는… 좋은 마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 김현정> 차라리 그렇게 해석해야 마음이 편하지 거기 누워 있는 아파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기관총을 쐈다는 건 이건 어떻게도 해석이 안 되는. 

◆ 정성수> 그렇습니다.

◇ 김현정> 아이고. 그런 일도. 

◆ 정성수> 그리고 두 번째는 27일날 광주가 함락되던 당시에 20사단이 들어오면서 우리 병원에 총을 사격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병실에 폭도들이 많이 있다는 그 소문하고 우리 의료진이 또 숙소에서 밖에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고 보고 있었더니 그쪽으로 해서 총을 쏴버렸거든요. 그래서 물론 맞지는 않고 유리창이 깨지고, 병실로 숙소 안으로 실탄이 들어오기는 했는데 그런 식으로 이제…

◇ 김현정> 숙소 안으로까지 총알이 들어왔어요, 실탄이? 

◆ 정성수> 그렇습니다.

◇ 김현정> 그렇게 그 정도 공포스러운 상황인데 의료진들 도망간 사람은 없습니까? 

◆ 정성수> 우리는 병원을 지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그 당시에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닥치더라도 온 시민이 한마음 한뜻이 되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것을 실제로 경험했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하더라도 서로 같이 돕고 한마음이 된다 하면 못 헤쳐 나갈 일이 없겠다 하는 자신감을 그때 받게 되었습니다.

◇ 김현정> 오히려, 오히려. 그래요. 그게 37년 전의 일인데요, 교수님. 아직도 생생하세요, 눈 감으면?

◆ 정성수> 그렇죠. 지금 생각에 광주의 아픔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발전에 상당히 기여했을 걸로 믿고 있거든요.

◇ 김현정> 물론이죠, 물론이죠. 

◆ 정성수> 물론 그 당시에 광주 현장에 있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 북한 소행이라든지 그런 모함을 지금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자기의 권력을 위해서 국민을 죽이는 집단은 반역자들이거든요. 지금도 그 반역자들이 살아 있고 이를 추종하는 세력이 아직도 일부 존재한다는 사실은 굉장히 슬픈 사실입니다.

◇ 김현정> 슬픈 사실. 그런 얘기 들을 때마다 어떠세요?

◆ 정성수> 참담할 따름이고요. 광주 민주화 항쟁이 아픔도 크지만 그 후에 우리 광주 시민들이 받은 상처가 훨씬 더 크거든요.

◇ 김현정> 그 후의 상처요?

◆ 정성수> 네.

◇ 김현정> 어떤 편견 같은 것? 

◆ 정성수> 광주의 아픔이 광주 시민만의 아픔이 되었습니다. 그래가지고 우리를 죽인 집단을 용서하지 못하는 그 상황을 오히려 지역주의의 원흉으로 지금 몰아갔거든요. 그래서 광주 시민을 폭도로 몰아가고. 그 당시에 받았던 2차 피해는 실제적으로 1차 피해보다도 훨씬 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현정> 그렇군요. 

◆ 정성수> 그러면서 느낀 것이 광주의 큰 아픔을 경험했던 사람으로서 지금도 남모르게 남의 아픔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겠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래서 남의 아픔을 그 사람의 아픔만큼은 느끼지 못할망정 그 사람의 아픔을 헤아리고 조금이나마 같이 아픔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고 우리 세월호를 보면서도 그런 것을 많이 느꼈였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남과 같이 아픔을 느낄 수 있는 이런 사회가 진정 민주주의 사회고 올바른 길로 가는 사회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김현정> 참 좋은 말씀입니다. 또 광주의 아픔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는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더 아프기도 하고 그러네요. 우리가 그 아픔을 헤아리고 어떻게 하면 치유해 줄 수 있을까 같이 슬퍼해 주는 거,같이 방법 찾는 거 여기까지도 이어져야겠습니다. 

◆ 정성수> 네. 

◇ 김현정> 오늘 귀한 말씀 대단히 고맙습니다. 

◆ 정성수> 감사합니다. 

◇ 김현정> 5.18 당시 전남대병원 응급실의 인턴이었습니다. 그 당시 상황들을 생생하게 기술한 분. 정성수 전남대병원 마취통증의학과 교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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