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보수로 이어졌던 정권 14년
탄핵·구속 첫 재판에 선 박근혜
노무현 8주기 참석 문재인 대통령

이명박 4대강사업 네번째 감사
여생이 짐으로 남은 전직대통령
그 지점에 비극이 자리하고 있어

 

김병길 주필

인생은 어파치 비극이 아니면 희극이다. 2017년 5월 23일은 우리나라 네 사람의 대통령 운명이 엇갈린 날이다.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세 전직 대통령과 문재인 신임 대통령이 한꺼번에 국민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하루였다.

2002년부터 이어진 진보정권-보수정권-진보정권 14년에 걸친 4명의 전 현직 대통령이 역사의 파도에 맞부딪친 하루였다. 국민들은 저마다 마음 깊숙이 밀려오는 안타까움 속에 전직 대통령들을 떠올렸고, 이런 복잡한 감정속에 당선 2주일을 맞은 문 대통령도 바라 봐야 했을 것이다.

23일 오전 9시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수감된 지 53일만에 열린 첫 재판에 피고인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수갑을 찬 양손을 모은 채 호송차에서 내린 박 전대통령은 수척해진 얼굴로 줄곧 바닥을 보며 법정으로 향했다. 남색 정장의 왼쪽 가슴에 수감번호 ‘503’이 찍힌 배지를 단 박 전대통령이 구치소에서 구입한 머리핀 4개로 만든 ‘올림머리’ 곳곳엔 흰머리가 비쳤다. 예전의 그 머리 스타일을 고수했지만 서툴게 만진 흔적이 역력했다.

“무직입니다.”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선 박 전 대통령 입에서 처음 나온, 재판부 인정신문에서 직업을 묻는 질문에 대한 짧은 답변이었다. 
5시간 뒤인 오후 2시 경남 김해시 진영읍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모역은 구름 같이 모인 추모객들로 붐볐다. 

넘실대는 노란풍선 너머로 문재인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와 함께 노 전 대통령의 사저를 나서자 추모객들은 ‘문재인’을 연호하며 대통령을 둘러샀다. 눈물과 애도속에 진행되던 추도식은 문 대통령의 인사말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자 박수와 환호로 바뀌었다. 8주기였지만 ‘노(盧)의 남자’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고 맞은 첫 기일(忌日)이다. 세상을 얻고 나서 노 전 대통령을 찾으니 회환이 몰려온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노무현 대통령 사망 직후 봉하마을로 문상을 갔다. 문재인은 박근혜에게 “질서 유지가 어렵다”고 했다. 박근혜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 뒤 박근혜는 대선 당선 때까지 승승장구하며 ‘선거의 여왕’으로 날개를 달았다. 문재인은 박근혜에게 패했다.

고인이 돼 8주기를 맞은 노 전대통령은 후배이자 비서실장이던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정치적으로 복귀한 셈이다. 극단적 선택으로 불행하게 삶을 마감한 노 전 대통령의 과거는 이제 ‘노무현의 꿈’으로 다시 태어났다. 문 대통령은 사실상 ‘당선신고’를 위해 현직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도식에 참석했다. 그리고 “노무현의 꿈은 깨어 있는 시민의 힘으로 부활했고, 우리를 여기까지 오게 했다”고 말했다.

또 한사람의 전직 대통령이 정치적 논쟁의 한복판에 서게 됐다. 4대강 사업에 대한 문 대통령의 감사 지시가 나온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혀를 차며 헛웃음만 지었다지만, 측근들은 반발했다. 4대강사업 네번째 감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문재인 정부 감정의 앙금이 만든 ‘정치 감사’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전직 대통령은 취임 때 한결같이 어느 정파의 수장이나 지지자들의 지도자가 아닌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물러날때가 됐을땐 불행한 대통령, 논란의 대통령이 된 것은 자신만이 옳다는 판단 아래 국민의 뜻을 거스르고 제대로 소통하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 독선 때문이었다.

권력을 휘두르는 데엔 제왕적이지만 정책은 국회에 막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대통령제는 수명을 다했다. 이제 내년 6월이면 새 헌법이 국민투표에 부쳐 질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계승자다. 추도식에서 남다른 감회를 느꼈을 것이다. 그 것을 어떤 방향으로 승화 시킬 것이냐는 문 대통령자신에 달려있다. 그리고 지금의 영광과 기회가 전임 대통령이 아집과 무능으로 무너졌기 때문에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유서에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여생을 짐으로 여겨야 했던 지점에 우리나라 전직 대통령들의 비극이 자리하고 있다.

2017년 5월 23일, 국민들의 머릿속은 하루 종일 어지러웠을 것이다. 세월엔 죄가 없다. 그러나 불과 10년도 안된 사이 흑백사진의 음영이 뒤바껴 얄궂은 하루 5월 23일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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