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5년 울산으로 유배 온 정몽주
반구대서 후학 지도하며 시름 달래
당시 한시·시조 지역문화에 영향

임 석시인·작가들의 숲 대표

포은 정몽주(鄭夢周·1337~1392)는 1375년 (우왕1년)에 언양현에 귀양을 왔다. 자목련이 피는 즈믄 봄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서울손님이 힘든 짐을 벗어 던지고 언양 요도(寥島)를 찾아 왔던 것이다. 
다 찌그러진 초가에 짐을 풀고 어깨를 어루만질 쯤, 마치 저 아래 풍광 아름다운 작괘천에 옥구슬처럼 흐르는 맑은 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포은이 누군가.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고려 후기 온건개혁파로 마지막까지 왕조의 종묘사직을 지키고자 했던 충신이 아니었던가. 
그가 울산에 유배를 왔던 것이었다.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당대 최고 수준을 자랑하던 대학자였는데, 그런 그가 울산과 인연이 되어 1375년에 언양으로 귀양을 와서 1년여 넘게 생활을 하게 됐다.  

        작천정에 가봐라 정자가 반듯하다
        묵객들 붙잡았던 넓적한 백포반석 
        작괘천 밝힌 꽃등에 무릉도원 새겼다

        누가 이 계곡에 절경을 그리다 말고
        잠시 새소리를 빌려와 도처에 풀어 놓았나
        나무와 물과 돌이끼 주객이 따로 없다

        유맥의 길을 닦은 ‘포은’이 다시 온 듯
        긴 세월 마애 석각은 공신들 껴 앉은 채
        거목은 한을 새기며 또 천년을 버틴다

        문득 벗을 생각하다 소주잔에 비친 노을
        산그늘도 뒤 따라와 수묵을 치고 있다
        쉼 없이 흐르는 물에 목욕재계 하는 시심(詩心)

                                                     「작천정 풍경」전문

포은은 24세에 장원 급제를 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39세이던 우왕1년에는 성균관대사성이 됐다. 
이때 이인임 일파의 친원정책 추진에 대해 강력 반대하다가, 그만 울산 언양 요도(蓼島, 현 KTX역 근처)로 귀양을 오게 됐다. 그는 풍광이 아름다운 작괘천과 많은 유적들이 혼재하는 반구대에서 후학을 지도하며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이 때 지은 한시, 시조가 울산의 문화를 일구는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는 출세 가도를 달리던 관리였기에 좌절감과 고달픈 나날에 외로움과 울분에 휩싸일 때도 많았을 것이다. 

1377년(우왕3년)에 유배에서 풀려나면서 급히 한양으로 올라간다. 고려왕조는 저물어 가는 해처럼 서서히 운명을 다해가고 있었고, 부귀를 누려오던 신하들은 제 살길을 위해 재빨리 다음 정권 밑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홀로 남아 끝까지 고려왕조에 대한 절개를 지키려했던 포은은 나라 일을 의논할 상대라곤 아무도 없었다. 

이런 세상을 아는 어머니는 아들 정몽주에게, 아들아 방금 유배생활을 끝내고 한양 땅에 왔으니 어는 게 백로인지 어는 게 까마귀인지 도무지 구별하기도 힘들고, 망나니 잡동사니 막 날뛰는 곳이니 까마귀 우는 곳에는 가지 말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포은은 이미 저 혼탁 속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인간은 자기 생각의 길을 걸어가는 동물이다. 한순간 생각이 삐끗해 길을 잘못 들어서면 종착지는 전혀 달라지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세상은 어디에서나 서로 대립을 한다. 하지만, 언제나 대립하는 것은 아니다. 야심성유휘(夜深星逾輝)라는 말처럼 밤이 깊을수록 별이 빛나는 법. 환경이 어렵고 힘이 들수록 성공의 빛이 더욱 밝고, 담금질의 수와 감내한 열이 강할수록 명검(名劍)이 된다고 한다. 뜨거운 여름을 품은 가을이 더욱 화려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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