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안 왜성 중 가장 큰 규모
역사적 가치·의미 찾기 위한
지역중심 문화관광개발 필요

 

임 석시인·작가들의 숲 대표

아직 끝나지 않은 가난한 슬픔 몇 점, 해풍에 종일 그을려 흐릿하게 취했나, 갑자기 덮친 폭풍의 조각들이 물음표를 던져주고, 이 골목 저 골목 투명 속으로 사라지는 어쩌면 사랑 같은 것, 때론 미움 같은 것. 하늘의 태양은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중세기 말엽의 골동품을 비추네. 

벼랑에는 자존심 박고 사는 몇 그루 소나무가 잠자던 넋을 한 번씩 깨워 주고, 정 치고 목도 멨던 영혼의 소리가 저 벚나무 숲에서 들려오네. 피와 눈물 대신 명선도 파도는 철썩철썩 갯바위를 부수면서 슬픈 기억을 허물고 있네. 그들은 작은 몸짓에도 흔들리는 나라의 운명 앞에 꺼져가는 불씨를 지피려고 있는 힘을 다해 뜨거운 불씨로 지폈고, 뜨거운 피 쏟으며 지켜낸 이 땅엔 지금은 당신의 아들딸들이 주인이 돼 살고 있네. 

추락하지 않는 바람은 잎새에 머뭇대고 소쩍새는 어둠을 끌어안고 밤마다 그리움 돼,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영혼들이 밑거름 돼 화려한 꽃으로 피어났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수많은 선인들의 넋, 당신의 자손들 가슴속에 숨을 쉬고 차가운 혈관을 두드려 깨우네.

                 성내 마을 뒷산에는 벚나무가 군락이다 
               봄 오면 꽃을 피워 달 향기 품어내고
               혹시나 배가 올려나 넋이 되어 기다린다

              산 정상 깎아 만든 해벌고도 망루에 서면
              높이도 제법인데 돌담길 길게 뻗어 있다
              두레박 길게 내리면 동해물을 퍼 올릴 듯

              내성의 정상에서 표지판을 읽는다
              ㄴ자형, ㄷ자형, ㄹ자형 축성 따라 
              아직도 성주 방에는 퇴군소리 들려온다
                                              「서생포 왜성」전문

조선시대 서생지역은 경상도의 경주, 안동, 문경 방면으로 진군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로 회야강과 진하바다를 접하고 있어 경상좌수영 휘하의 서생포수군만호진이 설치됐던 곳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리의 진성이 함락됐고 적은 그 인근에 군사 10만여명을 동원해 선조 25년(1592년) 7월부터 선조 26(1593)년에 걸쳐 거대한 석성으로 성벽은 현무암제의 자연석, 성벽 바깥에는 해자 등으로 진하 앞바다를 바라보며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규모가 가장 웅장한 성이 서생포왜성(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8호)이다. 그러나 문화재 중에 등급이 가장 낮다.

왜성이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중 왜군에 의해 축조된 성(城)’을 말한다. 이 왜성들은 말할 것도 없이 남해안 일대와 그 외 지역을 점거하면서 그들의 근거지를 확보하고, 자기네끼리 상호연락 등을 하기 위해 축조했던 것이다. 이러한 왜성은 현재 남해안 일대에서 이미 조사된 것이 30여개소에 달하고 있으며 대체로 강이나 바다에 인접한 구릉, 또는 야산을 이용해 축조한 것은 선박출입은 물론 왜군 서로 간에 연락을 하기 위해 용이한 장소를 택했던 것이다. 서생포수군만호진성(西生浦水軍萬戶鎭城)은 서생포왜성이 있기 전 태종7년(1407년)7월에 서생포수군만호를 뒀고, 세종7년(1425년)에 만들어진 경상도지리지에는 좌도(左道)의 도만호(都萬戶)를 서생포에 두고 있다고 한다. 

하여튼 加藤淸正(가토 기요마사)의해 그들의 거점을 만들려고 서생포왜성을 쌓기 시작했는데 무너진 수군만호진성의 많은 석재를 헐어가서 축성을 쌓아올린 것이 지금의 서생포왜성이다. 이곳에 성곽체험을 통한 한·일 역사교육의 장을 만들고, 성곽유구 및 자연환경의 훼손을 최소화하는 보전적 개발과 미래세대의 지속 가능한 관광개발, 그리고 서생포왜성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와 의미를 찾아 일시적 개발방식을 탈피하고 단계적이고 지속적 개발이 되도록 해 인근지역 관광자원과 연계한 주제별, 일정별 다양한 관광코스가 되도록 지역중심형 문화관광개발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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