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식울산시선관위 홍보과장

제3공화국은 1961년 5·16군사정변에 의한 1년 7개월간의 군정의 뒤를 이어 다음해 12월 17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개정헌법에 의해 ‘63년 10월 대통령선거와 11월 제6대 국회의원선거를 거쳐 12월 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취임함으로써 출범한 한국의 3번째 공화헌정체제이다.  
제4공화국은 제3공화국의 연장선상에서 ‘72년 10월유신(十月維新)으로 수립된 뒤 ‘79년 10·26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유신체제와 그 이후에 들어선 최규하 정부 그리고 제8차 헌법 개정으로 제5공화국이 출범한 ‘81년 3월까지 지속된 대한민국의 네 번째 공화국이다.

제3·4공화국 시절 정당들은 민주공화당과 신민당으로 대별되며, 기타 민정당, 추풍회, 민주당, 자유민주당, 정민당, 국민의당, 한국독립당, 대중당 등 여러 정당들이 부침했다. 정부여당인 민주공화당은  김종필을 중심으로 정치활동 재개에 1년 앞서 사전조직한 후 ‘63년부터 근대적 정당을 표방하며 사무국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원외정당체제를 구축했다. 출발부터가 이원적 조직으로서 당내 계파의 형성 및 이들간의 파쟁은 예고된 수순이었다. 

민주공화당은 각기 출신배경을 달리하는 인적 구성을 가졌는 바, ‘63년 1월 창당준비위원회 구성을 보면 ①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 주체세력들 ② 민간인 발기인들 중 노장층 ③ 민간인 발기인들 중 소장층 및 중앙과 지방의 사무국 간부들이다. 바로 이들이 민주공화당의 주류, 비주류, 당료파로서 3공화국내내 파벌과 당쟁을 벌이게 된다. 그 후 제4공화국에서도 민주공화당은 집권여당으로서의 역할은 했으나, 유신정우회가 등장하자 민주공화당은 원내 제2교섭단체로 전락하게 되어 크게 약화되고 그동안 극심한 대립·갈등을 보였던 파벌들은 해체되고 만다.

야당도 ‘63년 1월 1일자로 정치활동이 재개되자 새로운 정당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재야세력의 이합집산은 제2공화국의 그때를 벗어나지 못하고 다시금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 해 1월 9일 윤보선, 김병노, 이 인, 전진한 등 이른바 4자회담으로 신당의 창당이 구체화됐으나, 전 민주당계의 박순천, 홍익표는 단일 야당의 선행조건으로 대통령후보 사전합의를 주장했다. 열흘 후 전 신민당계, 전 자유당계, 전 민주당계 일부, 그리고 무소속 등이 모여 민정당을 정식으로 발족시켜 윤보선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했다. 그러나 민정당내부의 신민계와 비신민계간의 암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편 민정당 창당과정에서 이탈한 박순천을 중심으로 한 세력들은 ‘63년 7월 18일 민주당을 창당, 재건 등 이러한 정당간 이합집산을 거듭한 산고 끝에 ‘67년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그 해 2월 7일 통합야당인 신민당이 창당되었다. 

창당 당시 신민당은 민정당계, 신한당계, 민주당계, 재야중도계, 총재 직계, 구 자유당계, 혁신계 등 다양한 파벌들이 존재해 있었으나, ‘67년에 양대 선거 이후 당내파벌은 유진오 총재를 중심으로 한 민정계(유진산계)와 총재 직계의 친위부대로 구성된 주류를 비롯해 비주류의 신한계, 민주계, 재야 등 4개 파벌이 생기면서 파벌과 당쟁을 벌이다가  ‘80년 10월 27일 제5공화국 헌법이 공포되면서 신민당은 ‘67년 2월 11일 창당된 이래 13년 8개월만에 자동 해산되고 만다. 여야를 불문하고 한국정치사의 어두운 속살이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제3공화국은 대통령직선제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교적 경쟁적인 선거’의 모습을 보였다면, 유신체제는 대통령선거에서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통한 간선제를 채택함으로써 국민주권을 박탈한 시기로서 한국의 민주주의는 부정되고, 정치는 파행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다. 
구체적으로 ‘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 ‘74년 1월 8일 긴급조치 선포, ‘75년 1월 22일 유신찬반투표 실시, 그 해 4월 고려대에 군 투입, ‘79년 10월 4일 김영삼 총재 제명, 그 해 10월 부산·마산 지역에 계엄령·위수령 선포 등 유신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정치적 갈등이 계속됐다. 
이처럼 제3·4공화국은 정치적으로 정당다원주의가 제한된 시기로서 민주주의의 시련기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 이 시기의 경제는 꾸준히 성장했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60년 장면정부시절에 79달러였으나 79년에는 1,745달러로 22배 증가했다.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성공적 달성과 새마을운동의 확산으로 한국은 낙후된 농업국가에서 중화학공업국으로 발전한 것이다. 
공자의 제자였던  관중의 ‘倉廩實 則知禮節 (창름실 즉지예절) 衣食足 則知榮辱 (의식족 즉지영욕)’ 즉,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을 안다’는 말이 있다. 경제발전과 민주주의 시련기라는 동전의 양면 같은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어떻게 나올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를 겪고 일어선 우리 국민들이 대단하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