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사) 공동체 창의지원 네트워크
상임이사

어린 시절, 내가 살았던 마을은 나지막한 언덕이 둘러싸고 수많은 개울이 미로처럼 얽혀있어 늘 따뜻한 느낌이 있었던 곳으로 기억된다. 

우리 마을에서는 누구나 무엇인가를 조금 더 가져도 혹은 조금 덜 가져도 살아가는 모양새는 매한가지였고 행사라는 것은 원래 큰집에서 한 달에 두서너 번씩은 당연히 있는 것으로만 알고 자랐다. 

마을에 살면서 요란스런 날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큰 일이 생겨 경찰이나 공무원을 부를 정도의 일은 있지도 않았고 행여나 그들을 부를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그러기 전에 마을이 있었고, 마을의 어른들이 있었다. 마을은 이런 관계 속에서 각자 역할이 형성 돼 있었기에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며 그렇게 염연히 살았던 기억이 난다.

개발이 시작되면서 빈 술병과 쓰레기가 가득한 길과 온갖 생활하수가 들어찬 개울은 비만 오면 정체모를 비릿함으로 나의 오감을 기분 나쁘게 자극했다. 대학교가 인근에 있었던 탓에 1980년대 민주화를 위한 화염병과 최루탄, 깨진 보도블록은 마을의 편안함을 빼앗아갔다.

마을사람들은 땅값, 집값이 조금 오른 것에 위안을 삼으며 마을을 떠났고 우리 가족 역시 빈 집만 덩그러니 두고 이사를 나왔다. 그렇게 유년시절 기억 속 나의 마을은 사라져 버렸다.

도시를 건설하고 집을 지었으나, 재개발은 갈등을 만들고 삶의 터전을 떠나게 만들었다. 몰인간적인 도시공간 속에서 속도와 효율을 중시하는 경쟁은 도시 내 높은 인구이동 그래프를 그리고 있고 자살, 저출산, 독거노인, 자폐, 양극화 등의 다양한 사회 문제를 양산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의 마을이며, 도시인 것이다.

한 때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면 행복할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먹고 살 수만 있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 될 줄 알았다. 그랬기에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우리가 참고 살던 1974년 미국에서는 경제사학자 리처드 이스털린 교수가 소득과 행복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결과로 세상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소득이 어느 정도 높아지면 행복도가 높아지지만 일정 시점을 지나면 행복도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는다는 이론이었다. 그 근거로 바누아투·방글라데시와 같은 가난한 나라에서 국민의 행복지수는 오히려 높고, 미국·프랑스·영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오히려 행복지수가 낮다는 연구결과를 제시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삶의 기준을 잡고 하나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다. 관계를 통한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다. 그 안에서 서로 약속을 하며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고 행복이라는 것을 찾고자 했다.

관계망을 형성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인 ‘정서적 개념’의 공간인 마을에서 상호연대, 상호부조에 기반하여 정서적인 결합을 유지하는 공동체, 작은 것이라도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 의지하며 살아나가는 연대체,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필요로 하는 ‘마을’인 것이다.

사회적경제, 도시재생, 공유경제, 창업인큐베이팅, 청년활동과 문화. 일명 사회혁신이라 불리는 영역들의 이야기들은 결국 다시 마을과 공동체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사회 혁신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모두가 행복하게 살기 위한 삶의 궁리이자 새로운 시도이다. 지역에서 혁신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결국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서 지역의 응집력을 만들어 내고, 사회 경험이 부족한 청년이 지역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취업과 창업 인큐베이팅이다. 

또 회사의 성장이 지역의 문제해결과 함께 작동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사회적 경제’이고, 지금까지의 개발방식과는 다르게 이런 사회적 경제 조직들의 연대와 협동으로 지역이 활성화되고, 쇠락한 지역을 거점으로 회복 기능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도시재생인 것이다. 

그리고 한정된 자원을 더욱 풍족하게 사용하고자 하는 것을 공유경제라 하고 사람을 지역에 머물게끔 동기를 만들어 주는 것의 총칭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이제는 상점가가 되어버려 더이상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어린 시절 나의 마을, 그리고 나의 뿌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새로운 ‘마을’, 새로운 공동체로 만들어가는 여정을 기록해 보려 한다. 그 기록의 중심에는 늘 사람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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