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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가 된 사람들'…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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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컷뉴스
  • 승인 2017.08.10 09:56
  • 댓글 0

"혐오표현은 실제 차별이나 증오범죄로 이어진다"

(노컷뉴스 자료사진)

"바퀴벌레 조선인을 몰아내자"
"착한 한국인도, 나쁜 한국인도 다 죽여라"
"조선인 여자는 강간해도 된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말을 듣고 불쾌감을 느낄 것입니다. 한국인이라는 집단 전체에 대한 '헤이트 스피치(차별·혐오 발언)'이기 때문이죠. 과거 식민지 조선에서나 있었을 법한 이 표현은 21세기 일본 사회에서 버젓이 재현됐습니다. 일본 극우 세력들은 재일 한국인·조선인의 재일특권을 허용해선 안 된다며 혐한 시위를 벌여왔는데요, 보다 못한 일본 정부가 지난해 헤이트 스피치 방지법을 제정했습니다. 

헤이트 스피치가 비단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죠.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먼저 문제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아래 문항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주관식입니다) 
①일본 내 혐한 시위
②맘충(엄마와 벌레의 합성어), 김치녀(한국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
③국민의당 이언주 의원의 '그냥 밥하는 아줌마' 발언
④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⑤왁싱샵 주인 살인사건

정답은 '혐오표현'입니다. ②, ③번은 단어 자체가 혐오표현이고, ①번은 혐오표현이 증오선동으로 이어진 경우입니다. ④, ⑤번은 사건에서 혐오표현의 맥락을 발견할 수 있는 사례죠. 최근 발생한 왁싱샵 살인사건이 '여혐(여성혐오) 콘텐츠 때문'이라는 지적에 대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데요, 우선 혐오표현의 개념을 명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12월 내놓은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 보고서는 혐오표현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어떤 개인·집단에 대해 그들이 사회적 소수자로서의 속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혐오하거나 차별·적의·폭력을 선동하는 표현"이라고 말이죠. 그렇다면 사회적 소수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말일까요? 성별이나 인종, 민족, 성적 지향, 출신 지역, 종교, 장애 등 특정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차별받는 집단을 의미합니다. 

한국에서 혐오표현 문제가 본격적으로 공론화한 것은 2012년 '일베' 사이트가 등장하면서부터입니다. 지난해 강남역 살인사건이 벌어지자 혐오표현을 넘어 혐오범죄가 심각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죠. 소수자 집단에 해악을 끼치고 사회통합을 저해하는 이같은 혐오표현은 왜 등장했을까요?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 사태 이후 경제적·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사회적 갈등은 남녀 갈등, 지역 갈등, 세대 갈등, 계층 갈등 등 다양한 형태로 표출됐습니다. 역사적 패턴을 보면 갈등이 해소되지 않을 때 중세 마녀사냥이나 나치의 유대인 탄압처럼 사회적 희생양을 찾는 경향이 있는데, 오늘날에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으로 자리 잡게 된 거죠. 

혐오표현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됩니다. 차별적 괴롭힘과 차별 표시, 공개적인 멸시·모욕·위협, 증오선동이 모두 혐오표현에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난달 이언주 의원이 학교 비정규직 급식 노동자의 파업에 대해 "조리사는 그냥 동네 아줌마들이다. 밥하는 아줌마가 왜 정규직이 돼야 하느냐"는 발언을 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는데요, 당시 민주노총 소속 여성 노동자들은 "여성들의 노동권과 인권을 심각하게 훼손한 여성혐오·여성비하 발언"이라며 반발했습니다. '급식→밥하는', '노동자→아줌마'로 치환한 것인데요, 여성의 노동 가치를 폄훼하는 인식이 깔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차별적인 발언, 즉 혐오표현입니다.

혐오표현에서 혐오란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뜻의 협소한 의미가 아닙니다. 외모나 신체 나이에 따라 여성의 '상품 가치'를 매기고, 여성을 남성의 성적 도구로 묘사하는 경우도 혐오표현에 해당합니다. 왁싱샵 살인사건에서도 여성을 성적 대상화하는 과정이 존재했는데요, 범인이 범행 전에 봤다는 인터넷 방송에서 BJ는 "왁싱 도중 섰다"는 자막을 비롯해 왁싱샵을 여성 혼자 있는 외진 곳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혐오표현이 여성을 쉽게 범죄의 표적으로 만들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지난 2015년 강력범죄 피해자 가운데 여성이 88.9%에 달할 정도로 여성 대상 범죄는 날로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인권위 보고서에 따르면 혐오표현 대상자인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등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자신의 정체성으로 인해 평소 누군가에게 욕을 듣거나, 위협이나 폭행을 당하는 등 범죄 피해를 입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질문에 성소수자의 92.6%, 여성의 87.1%, 장애인의 81%가 '매우 그렇다' 또는 '어느 정도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일상생활에서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입니다. 

다시 일본의 사례를 들어보겠습니다. 극우 세력인 '재일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은 지난 2009년부터 2010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교토 조선학교 앞에서 혐한 시위를 벌였습니다. '바퀴벌레, 구더기, 한반도로 돌아가라'는 등의 혐오표현을 접한 학생들은 자다가 오줌을 싸거나 한밤중 울음을 터뜨리는가 하면 심지어 외출을 못하게 되는 등 심각한 피해 증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일본의 인권 변호사 간바라 하지메가 '노 헤이트 스피치'라는 책에서 밝힌 내용입니다. 

공권력으로부터 2차 피해를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인권위 보고서에는 수개월 동안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온라인 스토킹을 당한 한 여성이 경찰에 신고했다가 되레 온정주의적 혐오표현을 겪은 사례가 나옵니다. 

범인한테서 "네 집으로 간다"는 메시지를 받고 경찰서로 달려갔던 밤, 저는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경찰서에 갔는데 "담대하게 굴라", "얼굴이 착하게 생겼고 표현이 말투가 조곤조곤해서 남자들이 순종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범죄의 타깃이 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니까, 공황발작이 오더라구(…) 경찰서를 혼자 나서다가 저는 멍하니 있었는데, 숨이 가빠지며 '막 죽을 거 같다', '내가 아무데도 못 갈 거 같다, 나는 여기에서 쓰러질 거 같다'는 느낌이 들고요. 공권력이잖아요. 경찰이 나를 도와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사례 B 여성

이처럼 혐오표현은 실제 차별 행위나 증오범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유엔 국제규약은 인종이나 피부색, 성별, 언어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는데요, 독일이나 캐나다 등 일부 선진국에서는 차별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도 혐오표현을 규제하려는 여러 시도가 있었습니다. 인종이나 출생지를 이유로 혐오한 자를 처벌해야 한다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 성별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자는 차별금지법 등이 발의됐지만, 명확한 기준을 세우기 어려워 논란 끝에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혐오표현을 규제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을 때마다 충돌하는 가치가 있는데요, 바로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는 것처럼 표현의 자유가 누군가에겐 폭력이 된다면 적절한 규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혐오표현 피해자는 정신적 고통을 느끼거나 심하면 자살까지 생각한다고 하는데요, 혐오표현은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고 나아가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는 경각심을 가져야 합니다. 인권 문제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죠.

인권위 보고서 연구책임자인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과 교수는 "공공기관이 공식적으로 혐오표현에 반대한다는 의지를 표명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합니다. 공공기관 차원의 즉각적인 개입은 추가 가해자를 예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지난달 취임한 정현백 여성가족부 장관이 혐오표현 TF(태스크포스)를 구성해 혐오표현에 적극 대응하겠다고 밝힌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시민사회의 역할과 더불어 혐오표현을 쓰지 않겠다는 개개인의 의지도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겠죠.

마지막으로 한 가지 교훈. 일본 극우세력의 혐한 시위를 막은 것은 일본 시민들이었습니다. 

※참고문헌
- 국가인권위원회, 혐오표현 실태조사 및 규제방안 연구(2016년/연구수행기관 숙명여대 산학협력단)
- 국회입법조사처, 혐오표현 규제의 국제적 동향과 입법과제(201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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