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말기 무신 우범선(禹範善·1857~1903)은 1881년(고종 18) 별기군(別技軍)의 참령관(參領官)이 되면서 개화파에 가담했다. 1895년 을미사변 때는 훈련대 제2 대대장으로 휘하 장병을 이끌고 일본군 수비대와 함께 경복궁에 침입, 명성왕후 시해를 방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 인해 체포령이 내려져 한때 피신해야 했다. 이듬해 아관파천(俄館播遷)으로 정국이 급변하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일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일본에 망명하게 된다.

망명후 도쿄에 거주하며 일본 여성 사카이(酒井)와 결혼한 다음 재기를 꿈꾸고 있던 중 1903년 12월 서울에서 파견된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했다. 그가 일본 여성 사이에 낳은 아들이 ‘씨없는 수박’을 개발해 유명한 세계적 농학자 고 우장춘 박사(禹長春·1898~1959)이다.

우박사는 1936년 도쿄제국대학에서 배추속(屬) 식물의 게놈 분석을 한 ‘종(種)의 합성’으로 한국인 최초로 농학박사 학위를 받으면서 세계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50년 우리 정부의 요청에 따라 농업과학 연구소 소장으로 귀국한 뒤, 1953년 중앙원예기술원 초대 원장을 맡았다. 국내에선 ‘한국 세포유전학의 창시자’로 평가 받는 계기가 됐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1930년대 우박사의 나팔꽃 연구물 등 관련 기록물 713점을 그의 기일인 8월 10일 공개했다. 이 기록물은 우박사 기념관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수소문 끝에 장남 스나가 모토하루 씨가 기증했으며 일반에 공개한 적은 없다. 2년간 요청 끝에 2015년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에 기증된 후 과학원은 자료의 영구 보존을 위해 기록원에 재기증했다.

아버지 우범선의 비극적 생애와 달리 1950년 귀국 이후 부산국립원예특작과학원 원장 등을 맡으며 한국 농업 발전에 기여한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58년이 지났다. 배추종자의 혁명으로 불리는 ‘원예 1호’와 제주 감귤, 강원 대관령의 병 없는 씨감자와 씨없는 수박은 그의 손에서 태어난 기념비적 명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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