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이드 인터뷰] 울산시 제6회 무형문화재 유길훈 벼루장

 김인수 벼루장이 손재주 인정
 벼루 제작기능 전수 받아
 완성품에 희열 느끼며 작업

 충북-안동-경주 거쳐 언양 정착
 대곡천변 최고의 벼룻돌 발견
 반구대서 16년째 공방 운영

 용연·구연 등 전통문양 조각
“언양벼루 보존·전승에 책임
 제작 강의 등 후학 양성에 매진”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유길훈 벼루장은 “전통문화가 나를 잠시 거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언양벼루라는 전통문화를 보존, 발전 전승해야 할 소중한 책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김동균 기자 dgkim@iusm.co.kr

희끗희끗한 머리카락, 손 곳곳에 박혀있는 굳은살, 유난히 굵고 큰 손가락에는 반백년동안 돌을 새긴 그의 인생여정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었다. 최근 울산시 제6호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벼루장인 유길훈씨를 지난 22일 찾았다. 그는 “지난 50년 돌과 함께 살아왔고 이제는 언양록석에서 마음을 묻는다”고 말했다.

◆‘최고 좋은’ 벼룻돌을 찾아 울산으로

당대 최고의 벼루장인 김인수 선생에게 벼루 만드는 기술을 전수받았고, 50년간 벼루만 만들어 온 장인의 공방은 생각보다 초라했다.

청안 이씨 제실을 관리하는 작고 허름한 집이 그의 작품 전시장이요, 작업실이었다. 
유 씨의 공방은 암각화 박물관에서 집청정을 지나자마자 새로 만들어진 공용화장실 뒤에 위치해 있다. 반구대 암각화 가는 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일반인들의 눈에는 전혀 띄지 않는 곳으로 도로명 주소도 ‘반구대 안길’이었다. 

유 장인이 이곳에 정착한지는 벌써 16년차에 접어들었다.

벼루 원료인 붉은 돌(자석)이 많이 나는 청주 두타산에서 작업을 하다 안동으로, 다시 경주 민속공예촌으로 작업지를 옮겼고, 지질전문가와 각종 문헌의 기록을 보고 2001년 5월부터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대곡천변 일대를 답사했다.

유길훈 장인의 언양록석 벼루공방. 반구대 안길에 위치한, 청안 이 씨 제실 관리실을 개조한 허름한 공간이다. 김동균 기자 dgkim@iusm.co.kr

3개월 만에 대곡천인근 공사현장에서 ‘벼루 만드는데 최고 좋은 돌’을 발견하고 더 이상 헤매 다닐 필요가 없다는 확신으로 2001년 8월부터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그에 따르면 언양벼룻돌은 돌의 색깔이나 강도면에서 중국의 유명한 단계연과 비슷하고 국내 벼룻돌의 장점들만 고루 갖춘 벼룻돌이다. 

먹이 잘 갈리고 돌의 입자가 고와 먹물이 탁하지 않고 써놓은 글씨에 윤기가 난다. 또 갈아놓은 먹물이 돌에 전혀 스며들지 않고 고스란히 머금고 있다. 

거북이 모양의 벼루.

◆타고난 손재주 알아본 당대 최고 벼루장

유장인은 당대 최고의 벼루장인 김인수(1908~1972) 선생의 옆집에 살았다.
1949년 평양에서 태어난 그는 1.4후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피난길에 올라 충북 진천에 정착하게 됐고, 그곳은 바로 상산자석 벼루제작을 하고 있던 벼루제작기능인 김인수선생의 이웃집이었다.

하루는 선생이 즐기시던 장기판 알 몇 개가 분실됐는데 고교 2학년이던 유 장인이 굵은 향나무 가지로 알을 만들어 드렸고 선생의 손재주를 알아본 김인수 선생은 큰 칭찬을 해주셨다. 

그리고 고교 졸업 후 진로를 고민하던 유장인에게 후계자가 없었던 김인수 선생은 벼루제작기능전수를 제안했다. 유장인은 손재주를 타고 났다.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니 예술 감각도 남달랐다.

용문양의 벼루.

“손재주가 좋다하니 벼루를 한번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 달 만에 도망갔습니다. 나이 스무 살에 하고 싶은 게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자유롭게 즐기며 사는 친구들이 부럽더라고요”.

다시 돌아와 벼루 만들기에 들어간 유 장인은 벼루 하나를 혼신의 힘으로 완성했고 성취감에 또 만들어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았다고 한다. 그렇게 완성품의 희열에 취해 지내온 세월이 50년이다. 

◆“언양 정착은 벼루장이의 운명”

유장인은 충북에서 안동, 경주를 돌아 울산 언양에 정착하게 된 것은 ‘벼루장이의 운명’이라고 말한다. 정착이후 알게 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대곡천변 일대에 벼룻돌과 관련된 역사적 흔적과 그 흔적에 관한 주민들의 증언 때문이다.

실제로 이 지역 옛도로명이 이미 硯路(연로·벼루길)라고 암벽에 또렷이 새겨져 있는 것이 발견됐고, 문화재 전문가들로부터 판독돼 보호 관리되고 있다.

최근에는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임한 주민으로부터 어릴 적 인근 대곡천변 반석에다 먹을 갈아 붓글씨를 쓰며 학습을 했다는 증언도 들었다.

“벼루길 흔적을 확인하니 먼 길을 돌아 내 고향 즉, 제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는 400여 년 전 길을 보수하던 석공들이 이 지역의 질 좋은 돌을 가지고 벼루를 만들어 학자와 시인과 묵객들에게 제공했었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 전통문화가 저를 잠시 거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양벼룻돌로 만든 벼루라는 전통문화를 보존, 발전 전승해야할 소중한 책임이라는 생각을 했지요.”

울산시 무형문화재 제6호로 지정된 유길훈 벼루장은 “전통문화가 나를 잠시 거쳐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언양벼루라는 전통문화를 보존, 발전 전승해야 할 소중한 책임을 느낀다”고 말한다. 김동균 기자 dgkim@iusm.co.kr

◆“벼루 만드는 것을 ‘느낄 줄’ 아는 이 찾아”

유 장인은 섬세하고 정교한 작업이 필요한 벼루를 일 년에 적게는 20개, 많게는 30~40개 정도를 만든다.

용연을 비롯해 구연, 매연, 심자연, 산수연, 십장생연 등과 같이 여러 종류의 전통문양을 조각하고 울산과 반구대와 관련한 벼루도 제작한다. 벼루를 만드는 도구는 스승께서 오랫동안 사용했던 도구도 있고, 대부분 직접 제작한 도구다. 

반구대 주변 돌이 벼루를 제작하기에 최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에 공사 장비를 든 사람만 만나면 담뱃값을 쥐어주며 자초지종을 설명해 10년 동안 작업할 분량의 돌을 공방 창고에 쌓아두기도 했다.

반백년을 돌과 함께 하면서 울산시 무형문화재로 자리를 잡은 유길훈 장인. 
그의 마지막 바람은 제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해 벼루 만들기 체험뿐 아니라 벼루 제작 강의도 만들어 벼루 만드는 것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을 찾고 싶다.

50년간 돌을 깎아내고 망치와 정으로 쪼아서 깨고 계속 밀고 새기다보니 어깨에는 딱딱한 굳은살이 생기고 손가락 마디는 굵어지고 변형이 생겼다. 그러나 그는 벼루 만들기를 멈추지 않는다. 

“문방사우가 합쳐져야 글이 나옵니다. 벼루혼자 되는 것은 하나도 없지요. 이름 없는 풀도 숲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듯이 전통문화의 한 일원이라는 자부심으로 작업을 해 나갈 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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