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동물 인구 1,000만 시대…아이는 안 낳아도 개는 키워
몇 조각 먹이로 길들여 놓고 ‘비굴하다’고 흉보는 인간
권력 주변에 사나운 개 많이 모여들면 현명한 사람 안모여

 

김병길 주필

음력으로는 아직 멀었지만 무술년(戊戌年) 개띠 해를 맞아 개가 주는 선물이 하나 더 늘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지난 1월 1일(현지 시각) 영국 중서부 우스터셔주(州)의 말번 힐에 개똥을 에너지 자원으로 이용하는 가로등이 등장했다고 보도했다.

원리는 간단하다. 가로등 아래에는 대형 세탁기만 한 개똥 수거 장치가 있다. 산책길에 애완견이 볼일을 보면 개똥을 수거해 이 장치에 넣고 핸들을 돌리면 된다. 분쇄된 개똥은 내부의 미생물에 의해 분해된다. 이 과정에서 부산물로 가스등을 밝힐 메탄이 나온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시도 개똥에서 나온 메탄으로 전기를 생산하겠다는 스타트업을 지원했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는 말이 있다. 이 회사는 시민들이 수거함에 개똥을 넣을 때마다 스마트폰으로 애완용품 가게에서 쓸 수 있는 할인 포인트를 보내주는 시스템도 만들었다. 

‘개똥’이나 ‘개떡 같다’면 ‘보잘 것 없고 천한 것’의 대명사다. ‘개똥 밭에 이슬이 내릴 때가 있다’면 ‘천한 사람이라도 행운을 만날 날이 있다’는 얘기다. ‘개똥 밭에 인물 난다’면 ‘지체 낮은 집안에서 호걸이 난다’는 얘기다.

민요와 속담에 등장하는 ‘서당개’ ‘똥개’와 같이 비천함의 상징이기도 했다. ‘야밤중에 우리 임이 오시더라도 짖지마라’ ‘자장 자장, 검둥개야 짖지마라’ 같은 민요에선 아무 때나 짖어 은밀한 만남을 방해하는 눈치 없는 훼방꾼이다. 무속에선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 주는 안내자가 개였다. 후각이 발달해 길을 잃지 않고 잘 찾아 간다는 데서 유래했을 것이다.

고려 때 책 ‘계림유사’(1103)에는 ‘가희(家稀)’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를 볼 때 고려 시대에는 ‘개’를 ‘가히’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가희’는 17세기 문헌까지 보이다가 사라지며, 지금은 일부 방언에만 남아 있다. 이후 ‘가히’는 모음 사이에서 ‘ㅎ’이 탈락해 ‘가이’로 변한 뒤에 축약돼 ‘개’가 된다. ‘개(kay)’는 18세기 말 이후에 지금과 같은 ‘개(kae)’로 단모음화 한다.

술에 취해 들판에 잠든 주인 곁에 불이 나자 몸에 개울 물을 적셔 불을 끄고 숨진 ‘오수의견(獒樹義犬)’은 고려시대 최자가 쓴 ‘보한집(補閑集)’에 실려 있다. 신라 김유신 장군 묘와 흥덕왕릉을 둘러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중 술신(戌神)은 얼굴은 개, 몸은 사람 형태로 의인화 되기도 했다.

육십갑자로 따지면 누런(黃) 개의 해의 무술년이다. 누런색이 금색과 닮아 복을 부른다며 ‘황금개’의 해라고도 한다. 궂이 ‘황금’이라 표현한 것을 보면 장삿속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런데 개의 기원을 살펴보면 황금개가 아닌 ‘황금 늑대의 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른다. 개와 늑대가 헷갈리는 것이 단순히 화석 때문만은 아니다. 개와 늑대라는 포유동물 중에서도 특별한 관계에 있다. 일반적으로 서로 다른 종을 교잡하면 자손이 태어나도 그 다음 세대로 이어지진 못한다. 그러나 개과(Canidae) 동물은 다르다. 개과 개속(Canis)의 늑대, 개, 코요테, 자칼은 서로 교잡이 가능하고 세대를 거쳐 번식이 가능하다.

현생 동물조차 구분이 어려운만큼 개의 기원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정설은 3만3,000~3만6,000년 전 공통 조상에서 개와 늑대가 분리 됐다는 설이다.

지구상에 있는 4,000여 종의 포유류와 1만여 종의 새 가운데 인간이 길들이는 데 성공한 것은 개를 포함해 10여 종에 불과하다.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제목과 달리 세상의 온갖 나쁜 개가 등장한다. 죽기 살기로 싸우거나, 사람에게 덤벼들거나, 아무 곳에나 용변을 보는 등 별의별 개들이 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반려견 행동 전문가가 등장하면 개들은 순한 양처럼 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신기한 건 사람 손을 탄 개도 야생에 풀어 키우면 마치 늑대 같은 들개가 된다는 것이다. 야생에서 개는 늑대의 본성으로 돌아간다. 살기 위해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생존의 법칙이다. 개가 아무리 온순하게 변했어도 개는 잠재적인 늑대라는 얘기다.

2015년에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는 청나라 사신들이 조선 왕실에 선물한 개를 키운다. 세자가 서인으로 강등되고 나서도 개는 변함없이 주인 곁을 지켰다.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전해지는 ‘견도(犬圖)’에서 착안한 영화적 해석이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관련 시장 규모가 올해 3조원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아이는 안 낳아도 개는 키우는 시대가 됐다.

세대별로 개에 대한 이미지가 먹을거리부터 ‘개팔자 상팔자’인 부러움의 대상까지로 스펙트럼이 넓다. 광복 후 교과서에 등장한 ‘바둑이’는 인간과 공존하는 개의 모습을 살펴보게 한다.

‘술집 개가 사나우면 주막의 술이 신다(狗猛酒酸·구맹주산)’는 말도 있다. 권력 주변에 사나운 개들이 많으면 현명한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법이다. 속담과 격언에 나오는 개는 하나 같이 흔하고, 천하고, 싸우는 모습이다. 

인간은 몇조각 먹이로 개를 길들여 놓고 개의 대가 없는 충성심을 비굴하다고 흉을 보기도 한다. 흔하다고 해서 곧 하찮거나 만만하게 볼 수 있겠는가. 개는 만만하다. 개는 오욕(汚辱)과 비루함을 견디며 굴러온 한국 현대사와 닮았다고 혹자는 말한다.

백석의 시 ‘개’에는 궁벽한 산골마을 겨울밤의 무섬증을 몰아내는 존재로 개가 등장한다. “접시 귀에 소기름이나 소뿔등잔에 아즈까리 기름을 켜는 마을에서는//겨울 밤 개 짓는 소리가 반가웁다.//이 무서운 밤을 아래 웃방성 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있어 개는 짖는다” 깜깜한 겨울밤의 공포를 향해 홀로 맞서 컹컹 짓는 개처럼 굳세어서 끄떡없는 2018년을 생각한다.

‘복종 또 복종’으로 재난을 누비는 구조견, ‘냄새는 나에게 맡기라’는 겸역 탐지견, 한눈 팔지 않는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희생을 보면 사람의 탈을 쓰고 무뢰한(無賴漢)이 되느니, 삽사리로 한 세월 사는 것도 괜찮겠다. 무릎에 앉혀놓고 ‘우리 똥강아지’라며 등을 다독이던 오래전 할머니를 생각하며 ‘개똥 같은 개를 위한 명상’에 젖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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