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숙은 1939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해방되기 직전 김춘숙의 부모는 폭격을 피해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로 귀국하였다가 전쟁 전에 서울로 왔다. 김춘숙은 약대를 졸업한 뒤 약사로 일하다 1967년 남편을 따라 울산에 왔다. 1969년부터 성남동에 약국을 열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다.

김춘숙 구술자가 이야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서울서 7년간 약국 운영하다
결혼해서 울산에 생활터전
1969년부터 약국 열어
70년대 울산, 외부 접촉 거의 없어
미군과 결혼한 여동생과 강동행
 반바지 외국인 등장에 난리
성남동 주변 여관·술집 많아
술깨는 약·위장약 많이 팔려

 

◆부산과 울산에서의 피난살이

트럭 타고 1.4후퇴 때 부산 영도까지 갔어요. 김천에 와서는 좁은 방에서 앉아서 잤어. 김천에서 하룻밤 자고, 울산 여기 와 가지고 또 하룻밤 잤어. 

우리 집은 일본에서 올 때 다 버리고 왔는데, 일본에 놔두고 온 게 있었어요. 제재소가 있었어. 아버지가 일본에서 나올 때 “당신이 관리를 해주세요”하고 나왔는데 그 아저씨가 세금을 꼬박꼬박 냈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재산을 찾았어.

◆약사가 되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에 들어갔어. 졸업하고 서울에서 7년 동안 약국 했어. 서울 와서 집 사고 내 집에서 약국을 하다가, 그다음에 아버지도 병들고 엄마도 그때 병이 나기 시작을 하니까 안 되겠어. 그래서 우리 집을 팔고 어머니는 다시 부산으로 내려오고, 나는 결혼해서 울산 오고.

아이가 자전거 타는 주변으로 태화강변 개발 당시 모습이 보인다.

◆결혼 후 울산 살이를 시작하다.

남편이 학교 졸업하고 취직자리가 없어 울산까지 내려왔잖아요. 서울에 어디 조그만 회사 다니다가 ‘울산이 공업도시 된다’ 그래갖고 아마 이래 내려온 거 같애. 그래 결혼하고 내려오니까, 나는 여기 울산도 못 있고, 부산 가서 부산서 한 석 달 있었나 보다. 

결혼은 66년도 했을 거야. 이화약국 이 앞 도로가 이거 전부 자갈밭이었어. 도로포장도 안 됐어. 울산에 와서 저기 교동에 방을 얻었어. 들어가자 부엌이고, 신발 벗고 방에 들어가는 한 칸 방을 얻어 살았어요. 양사국민학교 뒤쪽이야.

처음에는 단칸방에 살면서 그래도 인심들은 다 좋더라고요. 밭에 심은 거 다 갖다 주고 그랬는데. 차차 알게 되기 시작하니까 ‘왜 사람들은 공부를 안 하지?’ 내가 울산에 와서 처음 느낀 게 그거야. ‘자식들을 왜 공부를 안 시킬까?’ 우리는 전쟁 통에 쫓기면서 폭격을 맞아 가면서도 공부를 쉬지 않았는데, 여기 사람들이 전쟁을 안 겪어서 더 그렇게 안이했던 거 같애.

1970년대 이화약국 앞.

◆내 약국을 열다

지금 요 길로 쪽~ 내려가다가 고려약국이라고 있었어. 그러니깐 동강병원 그 밑에 고려병원인가 뭐 했어. 동강병원 전신이야. 옥교동사무소 그 근처에 있었어. 고려병원 위에 약국이 있었어. 그 위에 있는데 이 사람은 면허가 없어. 그래서 약사 구한다는 소문 듣고 거기 가 가지고 얼마나 있었나? 또 한 1년 있었나?

여기 방앗간이 박씨네 방앗간이 있고 구씨네 방앗간 두 개가 있었어. 박씨네 방앗간 집 그 앞에 구멍가게를 하는 할머니가 계셨는데, “여기 좀 오너라!” 해갖고 그 할머니 구멍가게 자리로 약국을 옮겼어. 젊었으니까 참 옮기기도 잘하지. 

내가 여기 토박이 약사님들한테 방해를 안 하려면 끝자락에 앉는 게 낫겠다. 가격도 싸고. 동아약국 거기 있었고. 요렇게 요렇게, 여기 대동약국이라고 있었어. 대동약국 그분도 부산대학 나오신 분인데. 그때 울산에 약국이 서른 몇 개밖에 없었어. 지금은 삼백몇 개가 넘는데, 근 사백 개가 되는데. 그때 여약사가 별로 없었던 거 같아. 이 밑으로 약국이 열세 개가 붙어있었어. 다 없어지고 나 혼자 남았다.  

 

1978년 8월 친척아이들과 공업탑을 배경으로 찍은 기념사진.

◆그만큼 울산이 외부와 접촉이 많지 않았어요.

한참 지나서 70년대 중반인가? 초반은 아닌 거 같고. 여동생이 미군하고 결혼을 해가지고 언니가 울산에 있다니까 놀러 온 거 같애. 정자를 같이 갔어요. 그때는 버스밖에 없었어. 집안에 뭐 아무것도 없지, 자동차 같은 거. 그때 정자 길도 요렇게 좁은 거, 꼬불꼬불하니 그 길이 근데 운치는 있어요.

여름이지. 그 동네 사람들이 난리가 나서 다 나오고, 빨리 가라고 난리였어요. 그만큼 여기가 외부와 접촉이 거의 없었나 봐요. 굉장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 같애. 70년대 중반인가 초반인가는 모르겠는데 그 외국인이 반바지 입고 그런 차림으로 바닷가로 왔다고…. 그때 울산 사람들은 반바지는 안 입었을 거야. 70년대도 할머니들은 다 치마저고리 입고 다녔어.

◆이화약국 주변의 옛 모습

약국 자리가 여관집이었어요. 여기 앞에서 김석주 정신신경과하고 성남 내과가 시작을 했어. 여기 앞에 건물에서. 두 집이 있다가 김석주 신경과는 집 사가지고 울산국민학교 앞으로 갔고. 강재근 선생님은 돌아가시고, 한 4년 됐나, 3년 됐나. 처음에 약국 열었을 때, 요 앞에 생선공판장이 있고. 그다음에 지금 성남프라자 있죠? 그게 옛날 재래시장 터예요. 여기 앞에 농협이 있었어요. 농협이었는데 팔고 성안으로 이사 갔어. 그때만 해도 그 농협 안에 슈퍼가 있었어요. 

사람들이 거기 슈퍼가 하나밖에 없으니까 들락날락 많이 해서 참 잘되는 거 같더니 차차차 동네 가게가 생기니까 안 되고. 남구가 생기면서 농협이 안 되더라고. 인구가 빠져나갔잖아. 그때부터 이 동네가 쇠퇴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재첩과 태화강

우리가 오니까 재첩이 많았어요. 아침마다 재첩국 끓여가지고, 동이 있잖아요, 그거 이고 다니면서 파는 아주머니가 계신데, 그 아들이 지금 재첩국 장사를 해. 차에다 ‘재첩국 사이소~’ 하는 할머니 목소리 넣어갖고 하는데. 그 정도로 태화강이 괜찮은데 점점 나빠져 가지고 재첩이 싹 없어졌지. 지금 재첩이 다시 나는 거 보면 좋아졌나 봐. 그래서 여기서 나는 재첩은 종자로 한다고 그러더라고. 먹지는 아직 않고 어디로 다 간대. 그러니깐 참 울산이, 지금은 이 태화강이 너무 보물이지. 진짜 보물이에요. 가로질러서 이렇게 강이 있는 도시는 많지 않아요.

내가 살아서 정이 들어서 그러나? 중소도시라도 울산이 괜찮더라고요. 비행장도 있지, 기차도 있지. 암만 그런대로 불편한 건, 이 동네가 좀 쭈글쭈글해서 그렇지.

◆약과 이웃 사람들

이 주변에 술집이 많았어요. 술집이니까 술에 관한 거, 술 깨는 약, 위장약, 이거 많이 나가고. 그리고 여기 유명한 190번지 술집이 있었어. 여기 오니까 쪼무리 깡패들이 우글우글했어. 지금은 다 없어졌어. 그냥 190번지 안에 술집만 쫘~악 있어요. 방석집이. 그것만 다 있었어. 뒤죽박죽이지. 그래가 맨날 술 먹고 싸우고. 유리점이 여기 있었는데 맨날 술을 먹고 싸우고 유리 깨고 그래서 유리점이 잘됐어. 

남구에는 아무것도 없었지. 술 먹으러 다 이 동네로 왔지. 젊은이들이 일터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냐. 당시에는 노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할 일이 없어서 이러고 화투 치고, 이 동네 지금도 화투쟁이들 많았어요. 

이 동네가 지금요 여관 천국이에요. 이 뒤에도 원룸이 몇 개 되고 이 앞에 조그만 조그만 여관이 스물아홉 갠가 그래. 근데 여관이 안 되니까 누가 와서 다 사냐면 중국인 노무자들 있지? 그 사람들이 한 달씩 와서 자고. 장기방을 하는 거야. 여관이 안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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