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철 복어 독 있고 미끄러워
남자들 가마니로 들고 다니며 판매
복어 한가마니 쌀이랑 물물교환도
병영 동쪽 병사들 칼 제조로 유명
서쪽은 ‘가지마라 골짜기’ 가맛골
사람들 거칠고 웃어른 존대 안해

 

노용택 구술자가 이야기하며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직접 그린 고향 마을.

 

 

◆온산면 대정리 대안마을에서 1931년에 태어났어요. 

지금은 온산공업단지가 되어버렸는데, 그야말로 농사를 주로 하는 마을, 온산면 대정리 대안마을에서 1931년에 태어났어요. 한학 공부도 좀 하고 신학 공부도 좀 했어. 옛날에 어디 뭐 직장이라는 게 있나. 그래서 공무원이라는 게, 교육 공무원, 아니면 행정직 공무원 이거 두 개뿐이었는데, 시골 면사무소에 공무원으로, 우리 고향 온산면사무소에 아마 한 15년쯤 근무했고, 그다음에는 저희 외가가 온양면인데, 온양면에 저희 아버지가 그쪽에 가서 살게 됐어요. 

◆전쟁 막바지라 학생들이 근로노동대서 일만 하고, 공부는 사실 안 했어. 

그때 초등학교 졸업을 해서 중학교 안 가면 군사훈련을 시켰어. 학교에서 일주일에 두 번씩, 초등학교 마당에서 군복 아닌 군복 입고 군사훈련을 시켰는데, 그 군사훈련 시키는 단체를 청년훈련소라고 그랬어. 청년훈련소 1년생은 1년 차, 2년 되면 2년 차, 그다음에 3년 되면 3년 차 되면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군대에 가고 이런 제도였어. 군사학교처럼 했어. 그래가 44년에 1년 차 청년훈련소, 45년에 2년 차, 그래 8월 15일에 해방이 됐으니까. 2년 차 때 해방이 됐어.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 살. 지금 중학교 딱 1학년쯤 됐는데. 

◆학교 졸업하고 준교사 시험을 쳐가 교사가 됐어. 

제일 처음에 온양초등학교, 그다음에 용암국민학교, 거기서 복산국민학교, 그다음에 병영국민학교 가서 1961년 5·16혁명이 날 때까지 선생 했어. 혁명이 나고는 군대 안 갔다 온 선생들 몽땅 다 파견시켰어. 1961년에 학교에서 강제로 퇴직시켜버리고, 그냥 쫓아버리면 안되니까. ‘국토건설단’하는 걸 만들어가 6개월 근무하면 병력을 필해준다는 제도가 있어가 거기에 가서 6개월 근무했지. 그게 울산에 있었어. 저쪽에 옥동 가는 도로 닦는데 투입이 됐는데, 여기 옆에 동헌 뒤에 대대본부가 있었는데, 학교 선생도 하고 이랬다고 대대본부에 기간요원으로 근무하게 해 줬어. 

◆국토건설단으로 대체 복무한 거지. 사회 복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거지. 

공무원들이거나 교사, 교육공무원, 행정공무원들 다 있어요. 이 사람들, 병력을 필했다는 걸 만들어줘야 사회에 다시 복귀할 수 있으니까 그래가, 혁명정부에서 그런 목적이 있어서, 군필이 중요했지. 우리나라 국민으로서 남자 같으면 그 3대 의무 중에 하나인데, 3대 의무를 필하 지 못하면 행세를 못 하잖아. 그래 근무하고 퇴직을 하고 다시 복직을 해가지고 대현초등학교 2년 있다가 다시 복산초등학교에 왔지. 복산초등학교는 결국 두 번 있었던 게 9년을 있었어. 

◆온산면이 우리나라 복어 주산지야. 

온산면 당월, 이진, 목도, 3개 마을이, 달포까지 4개 마을이 우리나라 복어의 주산지입니다. 복어는 겨울에 나. 복어는 독이 있어서 아무나 못 먹잖아. 그거는 또 여자들이 이고 다니면서 안 팔아요. 복어 껍질이 미끌미끌하기 때문에 남자들이 가마니에다가 넣어가지고 댕기면서 팝니다. 복어 한 가마니하고, 쌀하고 물물교환을 하는데, 쌀값은 그렇게 치면 쌀 한 됫박이 몇 십만 원 될 거야. 한 됫박 바꿔. 울산에서 됫박에 다가 고봉으로 해가 두 됫박을 주면 울산 사람들은 한 되라고 합니다. 그걸 울산 되라고 해. 그런 걸 모를 거예요. 

◆쌀이 귀했지. 제주에서 온 해녀들도 천초나 전복 가지고 바꾸러 왔어. 

쌀이 있는 집은 앉아 있으면, 전복도 이런 거 갖다 주고. 우리 거기 바닷가에 해녀들도 있었지. 해녀들은 해녀 일을 해가지고 쌀이 있어야 먹고 살아지니까 이고 옵니다. 해녀는 제주도에서 와서 방을 얻어가 한 계절 있지. 해녀들이 천초라고, 우뭇가사리 채취할 때 많이 나와요. 우뭇가사리 따는 기 가을인가 싶어. 여름은 아니고, 동네 사람이 제주도에 모집을 하러 가. 모집을 하러 가서 다섯이나 여섯이 모집해 와가 먹여주고, 우뭇가사리 따면 반반 씩 나누고 그래 했어요. 

◆참, 도시락 이야기를 해줘야지. 

도시락은 2차 대전 말이니까 쌀이 없잖아. 일본 사람들이 쌀을 다 가지고 가면. 도시락 검사를 하는 거야. 도시락에다가 잡곡이나 아니면 해초나 이런 걸로 도시락을 싸. 도시락 뚜껑을 열면 일본 선생이 검사를 해가 쌀밥 넣어온 놈은 벌을 준다. 도시락을 싸면 밑에는 쌀밥을 넣고 위에는 우뭇가사리 그걸 조금 덮어주면 일본 선생님한테 검사받고, 그래 먹을 때는 우뭇가사리 사알~ 걷어서 뚜껑에 내놓고 쌀밥만 먹고. 대개 일본 선생들은 같이 밥 먹어요. 교실 안에서. 살짝살짝 먹어야 돼. 

◆그야말로 우리가 실향민이야. 

헤어진 사람들이 하도 그립다고 해가, 우리 마을 그림을, 내가 기억을 살려서 그린 그림이 있어요. 그때 마을을 상상해서 집집마다 집을 쭉 넣고, 그림을 보면 저기가 우리 집이겠다고 느낄 만큼 그려서 그림 설명서를 붙여가지고, 화면이 30호짜리 그림인데. 그야말로 우리가 실향민이야. 온산읍 덕신리가 이주 단지인데, 이주 단지에 갔는 사람은 50% 안 될 거예요. 거의가 다 부산, 울산, 또 자녀들 이 있는 곳으로 다 헤어졌어요. 온산공단은 83년. 공단 지정이 된 거는 70년대 후반인데 우리가 철거된 거는 83년이야. 지정돼가 공장 짓는 데만 수용이 됐다가 83년에는 거의 수용이 다 됐어. 

◆병영에 칼 만드는 게 유명하잖아. 

옛날부터 병영에 병사가 있을 때, 병영에 칼 만드는 게 유명하잖아. 은장도하고, 담뱃대 만드는 그 기. 그때 칼 만드는 후예들이 지금 은장도 합니다. 동쪽 편은 그렇고, 서쪽 편은 군인들이 있으면 식사하고, 고 기도 잡아주고 이러잖아. 그 마을 사람들이 마음대로 다니는데, 서쪽 편 동네는 병영 사람들은 거기를 ‘가맛골’이라고 합니다. ‘가지 마라 골짜기’라. 가지 마라 골 짜기 준말이 가맛골이야. 지금 같으면 백정들. 소 잡고 돼지 잡는 이런 사람들 후예들이 사니까, 거칠지. 내가 병영에 갔을 때, 그 사람들은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존대를 안 합니다. 반말도 아니고, 하대지. 

◆1980년대까지는 다방이 문화공간이야. 

북정아파트로 올라가는 저 길이 울산의 옥교동 길하고 맞먹었어. 핵심적인 길이지. 울산초등 학교 복산초등학교 연결하는 1차선 도로 거기에 전부 술집이었어. 뜯어버린 상업은행 앞에 가로수다방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 엘피모라고 양복점 하는 그 집이 가로수다방 집인데, 저쪽에 시계탑 네거리 가면 내고향다방이라고 하는 게 있었어. 거기에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는 곳이야. 다방에 애인끼리 만나는 것도 있고, 직장이나 어디 파트너들이나 이래 남녀가 있으면 거기서 만나서 사랑의 이야기도 하고 이런 데야. 마담들은 거의 한복을 곱게 입어요. 신발은 구두를 신어도 옷은 꼭 한복을 입고 그래요. 그게 80년대까지 있었어. 카페라고 이름 붙은 것은 80년 하반기, 90년 다 돼가 카페라는 이름들이 붙었지. 그 외에는 찻집도 아니고 다방이야. 

그때는 우리가 다방에서 전시회 많이 했는데, 옛날에는 전시회 할 때가 없잖아. 벽면이 있으니까 주로 다방에서 전시회 했어. 중앙시장 입구, 옥교동 농협 바로 앞에, 거기에 그 집이 미도다방이야. 미도다방이 좀 나았어. 동헌에서 내려가면 대동다방. 일요화가회 초창기에 거의 다방에서 했어.
 
◆방적공장, 봉월 그리고 모래섬 

옛날 시외버스정류장 하던 그게 푹 이래 꺼졌는 지역이었어. 제일 밑에서 위에까지는 한 5~6미터쯤 푹 꺼졌는 이런 곳이었어. 그런 곳이었는데, 울산시 되고 택지조성하면서 다른 객토를 넣어가 그래 평평하게 바랐는 것이 그 시외버스터미널이야. 그전에는 지금 선경아파트 있는 거기에는 옛날에 선경직물이라는 방직공장이 있었어. 옛날에 집은 하나도 없고, 지금 태화 오일시장 서는 거기 일대에는 다 논이었어. 유곡동에서 내려오는 거기에 개천이 있었고. 울산시청 앞에 거기는 전부 고구마밭이었어. 거기는 땅이 전부 다 황토 땅이라. 황토 땅에 잘 되는 게 고구마, 콩뿐이거든. 황토 땅은 일반 농토가 안 되잖아. 시청 앉은 거기에는 그 동네 이름이 봉월인데, 거기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었어. 저수지가 많이는 없어. 거기 있었고, 뜯어 버린 태화호텔 옆에도 저수지 조그마한 게 있었어. 번영교 저쪽인데, 거기에 모래섬에 미루나무가 꽉 있었어. 섬 거기에 미루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시 되기 전에는 저녁에 여기 사는 사람이 더우면 태화강에 가서 전부 목욕을 했어. 타월하고 비누 가지고 가서 태화강에 가서 저녁에 목욕하고, 또 우리같이 젊은 사람들은 태화강에 헤엄쳐가, 모래섬에 가가 거기에서 놀기도 하고. 또 청춘 남녀들 모래섬에서 데이트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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