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용 백합초 교사

무언가를 주려는 ‘플러스 부드러움’과 반대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담담히 지켜봐주는 자세
성숙한 인격의 ‘진짜 어른’만이 가질 수 있는 힘

 

일본 작가 온다 리쿠의 <밤의 피크닉>이라는 소설엔 이런 대화가 나온다. 

“아냐. 타인에 대한 부드러움이 어른의 부드러움인걸. 뺄셈의 부드러움이랄까…” (중략) “대체로 우리 같은 어린아이들의 부드러움이란 건 플러스 부드러움이잖아. 뭔가 해준다거나 문자 그대로 뭔가 준다거나. 그러나 너희들 경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주는 부드러움이야. 그런 게 어른이라고 생각해.”

뺄셈의 부드러움은, ‘뭔가 해주는’ 플러스 부드러움과 대비되는 말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부드러움. 자세한 설명은 나오지 않지만, 누군가를 담담히 지켜봐주고 믿어주는 자세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소설에선 이 뺄셈의 부드러움이 어른의 부드러움이라고 말한다. 

예전 이 소설을 읽었던 20대에 이 대목이 더 빛나 보였던 것은, 누군가에 대한 애정과 마음을 표현하던 모습이 온통 ‘플러스 부드러움’으로 가득 찼던 시기였고, 언젠가는 어른의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다는 열망이 일어서였을 것이다. 

나이를 먹고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이 ‘뺄셈의 부드러움’을 가지기가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누군가에게 뭘 해주고, 무언가를 안겨주면서 격려하는 일은 기분과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쉽게 할 수 있다. 

‘상을 받은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일’, ‘프로젝트의 성과를 낸 직원과 부서에게 회식비를 건네며 격려하는 일’,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친구에게 박수를 치며 축하하는 일’, ‘좋아하는 사람에게 꽃다발을 건네거나 깜짝 선물을 주는 일’ 등. 

이런 일들이 플러스의 부드러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들에서 이렇게 반응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부드럽게 반응하기란 쉽지 않다.

‘시험을 망친 아이를 비난하지 않고 조용히 바라보는 일’, ‘오랫동안 준비해온 프로젝트를 실패한 직원에게 오너가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함께 뭔가를 해야 할 때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어울리는 것’ 등이 그렇다.

이런 일들이 어려운 것은, 이건 기분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플러스의 부드러움’이 어떤 상황에서 사람이 표현하고 싶은 본능에 가까운 일이라면, 위와 같은 상황에서 별다른 액션 없이 부드러움을 보이는 것은, ‘본능’을 거스르는 일이다. 오랫동안 쌓여온 인격의 성숙이 필요한 일이며 평소 사람을 보고 대하는 태도와 관계된 덕목이다. 그래서 더 어렵다. 

여러 학교를 거치면서, 많은 어른들을 만나지만 진짜 ‘어른다운 어른’이라고 꼽을 만 한 사람은, 바로 이 ‘뺄셈의 부드러움’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차이는 몸으로 금방 감지할 수 있다.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내가 하는 일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시에 찔린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하고 때론 너그러운 눈빛으로 든든한 후원을 받고 있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누구라도 그 느낌의 차이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뺄셈의 부드러움이, 나이 들거나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이가 어려도 친구를 대하거나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 이런 부드러움을 보이는 이들이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보고 ‘어른스럽다’고 평가한다. 

 한 발짝 뒤에서 미숙한 나를 기다려주고, 널 믿는다는 눈빛을 보내주며, 아무 말 없이 괜찮다는 미소를 보내주는 어른이 그립다. 어쩌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그런 어른을 그리워할 수도. 이 글의 첫 수신자는 나 자신이 돼야 할 것이다. 

점점 진짜 어른이 부재한 시대가 되어 가고 있다. ‘뺄셈’이 더욱 간절해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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