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목관 홍세태가 남긴 조선 후기 울산의 생활·문화
11. 말잡기의 노래

 

이정한 울산 현대고등학교 교사
방어진 동쪽은 바다에 닿았는데
 
방어진 동쪽은 바다에 닿았는데
목장엔 수초(水草) 우거져 수 만 마리 말이 있다네.
 
대완(大宛)과 월굴(月窟)이요. 당나라의 사원(沙苑) 같으니
나라의 마정(馬政)은 이곳을 의지한다네.
 
해마다 가을이면 살찌고 튼튼해져
목관(牧官)은 명(命)에 따라 굳센 말을 바친다네.
 
바다바람 서늘하여 풀잎이 시들 무렵.
별 보고 일어난 목자(牧子)들 새벽밥을 먹는다네.
 
대편으로 말 몰아 골짜기로 내려오니
유성(流星)처럼 내달리며 우박 흩어지듯 입에 거품 문다네.
 
처음엔 구름 밟고 절벽을 스치더니
홀연히 바라보면 바람 따라 넓은 땅을 내달리네.
 
일천 발굽 물고기 꿰듯 줄을 지어 마굿간에 들어가니
말떼에게 재갈물리기 수고롭네.
 
그 중 잘 달리는 말 준마(駿馬)라 일컫는데
임금님께 먼저 좋은 말 두 필을 바친다네.
 
서울 세 영(營) 날랜 용사 수 만 명
몸소 타는 용 같은 말 여기서 난 것이라네.
 
이에 말몰이 큰일인 줄 알았지만
다만 인간이라 구방고도 죽었다네.
 
말 기르다 재주 끊어질까 두려운데
황폐한 시골에서 헛되이 늙어만 간다네.

魴魚之津東接海 水草塲深萬馬在

大宛月窟唐沙苑 邦政攻駒盖有待

每歲秋高馬肥健 王命牧官精採獻

海風蕭蕭沙草黃 萬夫星言起晨飯

大鞭驅馬下山谷 星馳雹散爭噴玉

初看籋雲捎穹壁 忽見追風踔平陸

千蹄魚貫齊入圍 衆馬闉扼困受鞿

就中逸足稱駿良 先貢天閑二驌驦

漢京三營萬猛士 身騎飛龍出於此

乃知捉馬亦大事 只限人間九方死

恐有騕驊絶羣才 虛老炎荒草澤裏

위의 시(詩)는 ‘말 잡기의 노래(捉馬行)’로 앞에서 이미 언급한 전‧후 착마행에서 전착마행이 된다. 당시, 울산 목장의 마필은 왕실의 탄신 선물로 진상하는, 매우 훌륭한 말이 생산되는 국가적으로 관심이 많은 목장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리마가 생산되는 대완(大宛)과 월굴(月窟)과 같은 곳이며 당나라의 사원(沙苑)도 같은 곳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처럼 방목하여 말을 키우게 된 것은 전쟁과 같은 급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 바로 전투에 활용하기 위해서이다. 당시 말은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자 재산적 가치가 높은 동물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집의 마구간에서 키운 말은 대부분 콩죽을 먹여 살이 쪄 보기에는 좋았으나 지구력도 약하고 야외에서 노숙을 할 수 없어서 전쟁에 동원되기에는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울산목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영 목장에서는 이처럼 방목을 하여 말을 길렀던 것이다.

당시 목장에서는 새싹이 돋기 시작하는 봄부터 서리가 내리기 전의 가을까지 말들을 산야에 풀어서 길렀다. 그런데 봄에는 아직 풀들이 많이 자라나지 못하였고, 이미 겨울 동안 그동안 저장해 두었던 풀과 말의 양식이 거의 떨어졌기 때문에 목자들 수시로 말들이 노니는 곳에 풀을 펼쳐주어야 했다. 이것을 산초(散草)라고 하는데, 이일은 목자들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이면서도 매우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1)남목(방어진목장)의 목책과 목책문.

이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어 서리가 내릴 무렵이 되면 더 이상 말들을 목장에 풀어 둘 수 없었기 때문에 마구간으로 말들을 몰아넣어야 했다. 이러한 말몰이는 당시에 매우 중요한 일로서 농민들에게 있어서는 추수와 같은 행사였다.

당시 울산목장에서는 방어진 방향에서 대편리(한채)의 목책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이후 목책 주변의 트랙형식으로 만든 둥근 마환장에서 굴레를 하여 방어진 동진유역의 마구간으로 말을 몰고 갔다.

목장지도(1)에 의하면 남목의 경우는 석축으로 된 마성과 목장 인근의 목책이 설치되어 있고 마환장이 그려져 있지 않다. 그리고 목장문은 미포동 위의 산 능선부근과 목관 앞 제기들 부근 산 부분에 있다. 반면, 북목(2)은 목장문은 구룡포에서  계곡을 따라 가다 하나가 있고 다른 목장문은 흥환리 계곡 인근에 있다.

그런데 북목의 경우에는 목장의 목책이 없고 바로 마환장이 있다. 아마도 지형적인 특수성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북목의 경우는 목장이 너무 넓어서 2중으로 목책을 설치할 수 없었기 때문에 힘든 목책 대신 바로 마환장을 설치한 것으로 판단이 된다.

울산목장과 같이 이중 구조의 성으로 된 것은 동래의 오해야항 목장이다. 그런데 오야해항 목장은 마환장에 대한 시설물은 보이지 않지만 둥근 원을 그려서 마환장임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방어진목장도에는 마환장이 그려져 있지는 않다.

그런데 「울산목장 목지」에 의하면 방어진목장에도 마환장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구체적으로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위의 말몰이의 시를 보았을 때 말몰이는 목책이 있는 대편리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동래의 오해야항(3) 목장의 경우에는 마환장이 바로 마성 주변에 있다. 그러므로 울산 목장의 경우도 대편리 끝부분에 마환장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것은 말몰이를 한 후 말을 몰아 마환장을 돌게 했을 것으로 보인다. 알래스카와 같은 툰트라 지역 주민들의 사슴몰이의 경우에도 마환장처럼 둥근 트랙을 돌리고 좁은 길로 인도하여 사슴을 확인하고 그곳에서 사슴들을 구분하여 각각 다른 울타리로 몰아넣는 것을 본적이 있다.

아마도 당시의 목장에서도 말들을 몰아 마환장을 돌게 하여 그곳에서 각 말들을 점열하고 재갈을 물리면서 지난해의 말에 대한 기록과 대조를 위하여 장부를 통하여 일일이 확인하였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리고 장부에 없는 즉, 새롭게 태어난 말은 인장을 찍어 국영목장의 말임을 표시하고, 새롭게 태어난 말일지라도 어느 군두 소속인지를 밝히고 일일이 기록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2)북목(장기마성)의 문과 마환장.

목장에서는 암말과 수말에 대한 구분도 중요하지만 암말의 경우에는 좀 더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했다. 즉, 각 군별로 군두를 중심으로 새끼를 임신한 말을 구분하여 각각 기록을 하고, 이 말들을 특별히 구분하여 마구간으로 이동시켜야 했다. 반면, 아직 새끼에게 젖을 먹여야 하는 말들은 새끼와 함께 각각 구분하여 이들도 마구간으로 몰고 가야했다.

그리고 암말 가운데 다음해 임신이 가능한 말을 또한 따로 구분하여 마굿간으로 몰고 갔을 것이다. 그 외 늙고 노쇠한 말과 말몰이 과정에서 다친 말이나 병든 말은 따로 구분하여 정해진 울타리로 이동시켰을 것으로 판단이 되는 데 그것은 상황에 따라서 도축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마도 장부에 일일이 기록을 하고 따로 구분하여 말뚝에 묶어 두었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수말의 경우는 그 품질에 따라 여러 등급으로 구분하였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아마도 이러한 말들에 대한 평가가 곧 그들의 운명을 가르는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나이와 건강상태 등을 고려하여 결정을 하였다. 그런데 각 군에서 선발한 우수한 말 중에서 가장 먼저 임금에게 진상할 말을 골라 붉은 굴레를 하여 표시를 하였다. 이렇게 선발된 말은 이미 말이 아니라 상전이 되어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귀하신 몸이 되었다.

(3)오해야향 목장.

진상마 보다는 수준이 떨어지지만 그 중에서 좋은 말은 각 군영에서 요청한 숫자에 맞게 말을 선별하여 따로 말뚝에 고삐를 묶어 두었다. 이후 암말 100필에 필요한 종마로 각 15필을 선택하여 각 군의 마구간으로 몰고 갔다. 그 외의 수말은 모두 도살되었다. 수말의 운명은 순간의 선택에 달려 있는 셈이다.

이런 선별을 통하여 도살된 고기와 가죽은 보관을 오래 하기 위하여 건조를 해야 했다. 이렇게 건조된 고기와 가죽과 기타 부산물은 서울의 각 관아에 보급되어 고기와 말뼈는 식용으로 사용되고 가죽이나 말 심줄 등은 활 등의 무기 제조와 기타 신발이나 갑옷 등으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당시 도살한 고기와 가죽 및 진상마를 서울로 몰고 가는 것은 많은 시일과 경비가 소요되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경비마련을 위하여 목장내의 각 호마다 매년 필요한 경비가 정해져 있었고 해마다 따로 거두었다. 또한 서울로 진상하는 각종 물품을 운반하기 위하여 짐을 실은 말과 진상마를 몰고 가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었다. 이런 다양한 일을 하기 위한 시설이 있었는데 바로 점마청이다. 당시 점마청은 3간이며 점마서리청은 5간 이었다.

한편, 말몰이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이면서도 가장 위험하며 조심하여야 할 일이었다. 그것은 말몰이를 하면서 다치는 사람도 많았을 뿐만 아니라 말 또한 상처를 많이 입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몰이 과정에서 다친 말들을 ‘흠축마’라고 하는데 ‘흠축마’에 대해서도 사복시에 해마다 말의 숫자를 보고하여야 했다.

이와 같은 ‘흠축마’와 호랑이나 기타의 맹수에게 피해를 입거나 목장의 마성을 넘어 도망을 가버린 말 또는, 목장관리들 몰래 잡아먹어 없어진 ‘유실마’의 숫자는 바로 목장을 관리하는 감목관을 비롯한 관리들의 가장 중요한 실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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