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표현하는 순우리말 40개 이상…비에 대한 감성 각별
단군신화·기우제서 조상의 비에 대한 생각 읽을 수 있어
문학에선 왕의 은혜·폭정 등 다양한 비유 소재로도 활용

 

이병근 시인·문꽃사 대표

날이 끄느름하고 궂은비가 추적추적 거리니 대폿집 막걸리 파전이 생각난단다. 비오는 날 산촌에 묻혀 우수로 오감을 적시고 앉아 시인이 된단다. 실연의 몸살로 멜랑꼴리 해진 연인들이 비속을 걷는단다. 모두 비 때문이다.

비를 표현하는 순 우리말을 찾아 모아보니 많기도 하다. 비는 내리는 때와 모양과 그날 날씨의 형편에 따라 다 다르며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거나 자극의 변화를 느끼게 해 많은 시인묵객들로 하여금 글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또 비를 은유해 사랑과 이별을 다루는 음악 장르와 가수들은 얼마나 많은가. 빗줄기가 ‘실’같다고 해서 ‘실비’, 추적거리며 끄느름하게 내린다고 해서 ‘궂은비’, 필요한 때 맞춤 온다고 해서 ‘단비’, 이슬 같다고 ‘이슬비’, ‘안개 같다고 ‘안개비’ 등 무려 40여 가지가 비와 관련된 우리말 표현이다.

비는 보이는 것보다도 들리는 것에 더 호소력 짙게 표현이 된다. 사모하는 사람이 그리워 시름하는 밤에 달빛이 주는 ‘나’만이 시각적 자극이 되기보다는 혹 자고 있을 임을 깨워 자극 할 수 있는 궂은비의 낙수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가 더 임에게 호소력이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물방울들이 모인 것이 구름이고, 그 작은 알갱이들이 뭉쳐서 커지면 무거워 지고 공중에 떠 있을 수 없어 아래로 떨어져 내리면 그게 바로 비다. 사람을 포함해 모든 생물들은 비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농경사회에서 비의 역할은 매우 컸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태백산 아래 내려와 인간을 구제하려고 할 때 풍백·운사와 함께 우사(雨師)를 거느리고 온다고 해 비를 관장하는 관아가 등장하고 있다. 그만큼 농사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 있어서 비를 다스리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만일 하지가 지나도 비가 오지 않으면 나라와 각 지방별로 기우제를 지내 비가 오기를 하늘에게 빌었다. 이때 국왕은 수라상에 반찬을 줄이고 억울한 죄수를 풀어주는 등 여러가지 선심정치 방안을 마련해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는데 무슨 잘못이 있었는가를 반성하며 하늘에 비를 내려주길 빌었다. 

그러나 이러한 비도 너무 많이 오거나 적으면 가뭄과 홍수가 돼 농사에 지장을 준다. 입추 이후 비가 계속 내리면 다시 기청제(祈晴祭)를 지내 비가 개이길 하늘에 빌었다. 비는 농업의 흉년과 풍년을 좌우하는 것이며 민생과 직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제사가 있었던 것이다. 
비는 문학에서 여러가지로 반영해 나타난다. 만물을 자라게 하는 것이 비라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군왕이라 여겨, 가랑비가 방울져 연잎에 구슬로 떨어지는 고운 모양을 박인로는 가사 ‘독락당’에서 비는 군왕의 은혜로 비유했다. 또 이이의 ‘자경별곡(自警別曲)’에서는 임금의 은혜를 우로은택(雨露恩澤)이라고 노래했다. 군주를 도와 백성을 잘 다스리고 싶은 심정을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삼일우(三日雨)를 얻어 그늘에 시들은 풀들을 살려내고 싶다고 읊었다. 

이밖에도 장마 때의 비는 정치현실의 어려움으로 비유되기도 했다. 윤선도의 ‘하우요(夏雨謠)’에서는 비 오는데 들에 나가 농사에 전념 할 수 없으니 집안에서 소나 먹이고 쟁기, 연장이나 다스리라고 하며, 장마가 오래 지속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읊었는데 이때의 장마는 곧 간신배가 이끄는 조정을 비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비로 인한 홍수는 천지의 변혁과 폭정에 대한 비유다. 즉, 비는 하늘의 의지를 나타내는 징조이자 하늘을 공경하는 종교적 사상 일부로도 특징됐다.

순 우리말로 표현되는 비의 상념은 우리의 생활을 섬세한 것까지 자극해 풍부한 감성과 풍요로운 정신을 가지게 하지만, 때로는 기후의 변화를 가지고 오게 해 엄청난 피해를 주기도 한다. 

지금은 장마철이다. ‘장맛비’는 강한 바람도 만들어 내지만 ‘강한 비’, ‘난폭한 비’도 동반한다. 또 장맛비는 홍수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홍수설화’에 대한 종류와 몇 가지가 구비문학으로 전해지고 있다. 궂은 날 들어 앉아 이런 독서로 장마를 보내본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