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보안사 군장성 파티 자주 열어
눈치없이 ‘저 별’노래 윤형주 얻어맞아
군비판 연재소설 작가·기자 연행 고문

민간사찰 폭로로 기무사령부로 개명
‘계염문건’ 파동에 ‘군사 안보지원사’로
정치 개입하면 간판 바꿔도 소용없어

 

김병길 주필

전두환 전 대통령은 보안사령관 시절부터 가끔 인기 연예인들을 초청해 호화쇼를 벌이곤 했다. 1980년 국보위가 설치될 무렵, 신군부는 대대적인 조직개편을 위해 장성들에 대한 인사작업을 극비리에 진행하고 있었다. 당시 국군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주최하는 파티에 참석한 군장성들은 전두환 쇼를 즐기면서도 내심 불안하고 초조했다.

‘전두환 쇼’에 출연한 가수들 중엔 <저 별은 나의 별>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윤형주도 포함돼 있었다.

장성들이 가뜩이나 불안해서 좌불안석인데 가수까지 하필이면 ‘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같이 까만 눈동자/ 이 밤이 지나면 꿈도 지고 별도 지고…’ 운운하는 노래를 불러댔으니 화가 치밀었다.

윤형주의 노래를 듣던 많은 장군들은 자신의 어깨에 붙어있는 별들이 떨어지는 것을 비유하는 것 같아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윤형주는 눈치 없이 <저 별은 나의 별>을 열창하고 무대 뒤로 들어갔다. 이때 기다리고 있던 보안사 요원이 ‘야! XX 새끼야! 재수없게 장군님들 앞에서 별 떨어지는 노래를 불러?’라고 소리치면서 구둣발로 정강이를 걷어차더라는 것이다.

한때 악명 높은 보안사령부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금찍한 고문을 당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1981년 5월 중앙일보 기자 시절에 겪은 ‘한수산 필화사건’은 끔찍했다. 한수산의 중앙일보 연재소설「욕망의 거리」내용 가운데 ‘정부의 고위관리’ 등의 표현으로 가볍게 야유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보안사는 당시 중앙일보 편집국장 대리 손기상 등 7명을 서빙고 분실로 연행, 연재소설 게재 배경이 불순하다며 3일에서 5일간 혹독한 고문을 했다. 작가 한수산은 제주도에서 집필 도중 기관원들에게 연행돼 서빙고 분실에서 고문을 당했다. 이때 끌려간 사람들은 풀려난 뒤에 대부분 병원에 입원해 상당기간 치료를 받아야할 정도로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입었다. 작가 한수산은 이때 받은 고문 후유증으로 일본으로 떠나 10여년 동안 극심한 고통을 치유해야 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한수산 필화사건은 한마디로 어이 없다. 보안사의 지적처럼 소설 속 표현이 ‘야유’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욕망의 거리」는 젊은 여성이 부유하지만 나이가 많은 남성과 결혼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 일종의 애정소설이었다. 애써 문제가 될만한 대목을 찾자면 이런 것이었다.

1981년 5월 14일자 연재분에 탄광촌을 찾아가 그곳 아낙네들과 악수를 나누는 정부 고위관리의 묘사에서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를 하는 경우…’와 5월 22일자 연재분의 대화 가운데 “월남전 참전용사라는 걸 언제나 황금빛 훈장처럼 자랑하며 사는 수위는 키가 크고 건장했다.…세상에 남자 놈치고 시원찮은 게 몇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복 좋아하는 자들이라니까. 그런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온 얘길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라는 부분이었다.

첫번째 구절은 대통령을, 두번째 구절은 군을 빗대어 비하했다는 게 보안사가 한수산과 중앙일보 기자들에게 고문을 한 이유였다. 당시 정규웅 문화부 편집위원, 출판국 권영빈 출판부장, 이근성 기자 등은 어떻게 당했던가?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자마자 이들은 각각 독방에서 옷을 벗긴 채 검은 제복의 젊은이 5~6명으로부터 몽둥이질, 발길질 등 무차별 구타를 당했다. 한참을 폭행 당한 후 고문실로 끌려가 물고문·전기고문·엘리베이터 고문 등 갖가지 고문을 당하며 심문 받았다.

심문 내용은 여자 문제, 간첩과의 접선 여부, 촌지를 받았는지 등 연재소설과는 상관 없는 것들이었다. 취조실로 끌려가 얻어맞은 다음에는 자술서 쓰기 등 고초를 겪고 70여 시간 만인 6월 1일 오후 초죽음이 되어 풀러났다는 것이 그들의 증언이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한수산과 대학동창이라는 이유로 연루된 시인 박정만이 당한 혹독한 고문이었다. 박정만은 고문 후유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1988년 8월 6일 아침, 출근길의 언론인이 회칼 테러를 당한다. 다짜고짜 달려들어 흉기를 휘두른 건장한 사내들은 정보사령부 소속 군인들이었다. 오홍근 중앙경제신문 사회부장이 시사월간지에 기고한 ‘청산해야 할 군사 문화’ 칼럼이 화근이었다.

칼럼은 고지를 점령하듯이 밀어붙이는 정치행태, 능률만 앞세워 반대 목소리를 억누르는 권력의 일방통행, 국민을 보호 대상이 아니라 군림의 대상으로 보는 반민주적 시대착오를 고발했다. 1988년 언론인 테러는 ‘6월 항쟁’ 이후 내부자의 제보로 전모가 밝혀졌다.

‘계엄문건’ 때문에 국군기무사령부가 사실상 해체된 뒤 새로 창설된 군 정보부대의 명칭이 ‘군사안보자원사령부’로 정해졌다. 1991년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폭로 사건으로 이전의 보안사령부가 기무사령부로 바뀐지 27년 만에 간판이 또 바뀐다.

모체는 1948년 국방경비대 육군 정보처 특별조사과였다. 이후 특별조사대, 방첩대, 특무부대, 방첩부대였다가 1968년 육군보안사령부로, 1977년 국군보안사령부로 확대됐다. 보안사는 1979년 12·12 쿠데타의 주축 역할을 했다. 그 결과 두 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기무사령부는 북한과의 첨예한 대치 속에 보안·방첩 등의 국가기밀업무를 담당해야 할 군 정보기관이다. 그런 기관이 권력 중심부에 똬리를 튼 ‘정치군인’들에 의해 점령되면 불행해진다. 나라를 지킨다는 미명 아래, 그들에게 국민은 제압하고 관리할 대상일 뿐이다. 아무리 간판을 바꾸고 조직의 물갈이를 해도 정치 권력이 그들을 놓아주지 않으면 개혁은 도로아미타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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