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부들이 바친 울릉도 붉은 소라, 감목관은 술잔으로 애용

그림=배호.

천년을 바다 밑에서 살아온 붉은 소라는
푸른 파도 토했다 마시며 돌무더기 배를 채웠다네.
아롱진 푸른 껍질엔 이끼 먹은 흔적 있고
붉은 노을 머금고 아침햇살에 번쩍이네.
어부들 전복 캐러 외로운 배 떠나가는데
울릉도 가장 깊은 물속이라네.
우연히 이 소라 움켜잡아
나의 술잔 되었으니 너무나도 기묘하네.
천만번 갈았는지 둥글고도 매끈하여
오색광채 뿜어내니 여의주 구멍 같다네.
규룡 모양으로 솟아올라 단단하니 하늘의 별 같은데
속은 넓어 술 붓기 넉넉하다네.
아침저녁 아끼며 손에서 놓지 않았더니
단정한 잔에 봄 술 부어 마시면 풍미가 넘쳐나네.
깊은 가을 구월에 단풍잎이 떨어지면
눈에 가득 산과 바다 서글픈 풍경이라네.
이럴 때 한 잔 술로 온갖 시름 달래는데
흠뻑 취해 곤드레되면 다른 무엇이 필요하나.
천리 밖 나그네의 시름 나도 몰래 잊어지니
바람결에 숨을 쉬며 달빛 삼켜 가슴 씻어낸다네.
푸른 바다 굽어보니 빙옥(氷玉)같이 깨끗한데
어룡(魚龍)들은 괴이하게 자취를 감추었네.
붉은 소라잔이여.
내 이제 너와 함께 이곳을 떠나갈 때
서울로 돌아간 어느 때에 울릉도 바위 밑에 되돌려 보내리라.
 

赤螺千年海底伏 滄波吐呑磊磈腹

斑爛蒼甲蝕苔痕 內含頳霞映初旭

漁人採鰒孤舟去 欝陵之島最深處

偶然挑得此螺出 與我爲杯太奇絶

千磨百鍊圓且滑 五彩逬射驪珠穴

虬形佶栗星錯落 廓乎其中足容物

愛玩朝夕不去手 風味端宜酌春酒

深秋九月霜葉脫 海山滿目憀慄後

此時一酌消百憂 頹然醉倒無何有

使我不知千里客 呼風欱月蕩胸臆

俯視瘴海如氷壺 魚龍百恠皆屛跡

 

赤螺杯

吾今與爾同出處

北歸他時欝陵石
 

홍세태의 초상

위의 시는 ‘붉은 소라잔의 노래(赤螺杯歌)’ 이다. 전반적으로 대형 소라로 만든 잔으로 술을 먹으며 소일하는 그의 멋스러운 풍취를 느낄 수 있는 시이다. 
한편, 당시 울릉도는 도해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공개적으로 어부들 전복 캐러 울릉도로 배 떠나가는 장면을 노래하고 자신이 받은 붉은 소라잔은 울릉도의 깊은 바다에서 잡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된다.
「국역 비변사 등록 」 정조 23년(1799년) 을미시월 초 2일에 의하면
 
“경상감사 신기(申耆)의 장계에 초기하여 회계하라는 명이 계셨습니다. 그 장계를 보니 좌병사(左兵使) 이보한(李普漢)의 첩보를 일일이 들며 울산(蔚山) 사는 사공(沙工) 두 놈이 울릉도(鬱陵島)에 몰래 들어가 복어(鰒魚)를 채취하여 발매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끌어다 신문하니 그들은 공문(公文)을 올려 장표(掌標)를 받아 제주(濟州)에 가 복어를 채취하려 하였는데 바람을 만나 표류되어 울릉도에 도착하였으며 월송만호(越松萬戶)와 동래 왜학(東萊倭學)은 마침 수토차원(搜討差員)으로서 먼저 울릉도에 도착하여 공문을 상고하고서 바람에 표류된 정황을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무른 지 3일에 갑자기 풍랑을 만나 그의 배는 부서졌고 수토기복선(搜討騎卜船)도 부서져 그 부서진 재목을 합하여 한 배를 만들고 약간의 식량 쌀과 많지 않은 남은 재목을 주어 그들에게 배를 만들어 나오게 하고 먼저 배를 출발시켰습니다. 그러므로 머무는 동안 섬 주변의 생전복을 거두어 근근이 연명하였는데 먹고 남은 수가 2백 50여 첩(貼)이요, 이 밖에 한 줌[把] 되는 장청죽(長靑竹) 8개 및 반 자[尺] 되는 향목(香木) 다섯 개를 수토차원들이 버려두었으므로 주워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므로 곧 수토차원 가운데의 왜학에게 관문(關文)을 보내 물으니 보고한 바는 역시 포민(浦民)의 공술과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방관에게 신칙하여 형신(刑訊)하며 엄중히 조사하게 하였으나 몰래 들어간 형적을 끝까지 찾아낼 수 없었고, 바람에 표류된 증거는 대략 근거할 수 있었으며 복어와 향과 죽은 모두 금하는 물건이었으나 어려움 없이 채취하였으니 징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중간 생략) 경상 좌병사 이보한(李普漢)을 우선 추고하고 지방관 울산부사 이정인(李廷仁)을 역시 종중추고하며 죄를 범한 각인을 다시 엄중 신문해서 실정을 밝혀 법에 따라 처치하고 수토 때 배를 같이 탄 역학(譯學)도 당해 도에서 일체 엄하게 다스리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리하라고 답하였다.
대형 소라.
위의 경우는 1799년 울산 어민 2명이 울릉도에서 복어와 전복, 향목 등을 채취하여 발매하다가 적발되었다는 내용이다. 이처럼 당시 울릉도로 가서 전복을 채취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또한 만약 적발되면 해당 지역의 지방관도 함께 처벌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위의 ‘붉은 소라잔(赤螺杯歌)’ 시는 시기적으로 70년 정도 차이가 있지만 어부들이 전복 캐러 외로운 배 떠나가는데 그들이 궁극적으로 가고자 하는 곳은 가장 깊은 울릉도 물속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국법을 준수해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는 해당 지역의 지방관으로서 그들을 제지하지도 않고 말없이 지켜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외롭게 떠난다며 그들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당시 울산목장내의 어민들은 서울의 사복시와 관아에 엄청난 양의 전복을 상납해야 했기 때문에 전복 채취가 매우 중요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감목관이 사실상 인정해 주는 상황에서 몰래 울릉도에 들어가서 전복을 채취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당시 어부들은 울릉도에 자생하는 까막 전복의 변종을 채취하였을 것으로 판단이 된다. 그런데 껍질의 무게만 무려 1.8㎏이나 제주도의 우도 박물관에 전시된 전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만약 붉은 소라가 전복 껍질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아마도 최소한 대접크기일 것으로 여겨진다.
<울릉도 전복> 조간대에서 수심 20∼30m 사이의 바위에 서식하며 산란기는 7∼11월, 산란수온은 약 20℃이다. 어릴 때는 바위 등에 붙어있는 규조류를 먹으며 살다가 성체가 되면 주로 미역, 다시마, 감태 등 갈조류를 먹는다.
수명은 12년 정도이며 섭취하는 먹이의 종류에 따라 껍데기의 색깔이 조금씩 달라진다.
울릉도 부근에 사는 참전복은 까막전복의 한류성 아종으로 취급하기도 하며, 이를 까막전복의 지리적 변이로 여기는 경우도 있다.<출전:두산백과사전>
전복은 비교적 수심이 깊은 곳의 바위에 서식하기 때문에 전복채취는 해녀들이 했다. 그런데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남자들로만 구성이 되어서 떠났을 것으로 판단된다.
어찌되었던 그들은 가족들과 헤어져 험한 뱃길을 따라 멀리 울릉도로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리고 어부들은 울릉도를 다니면서 얻은 아주 오래된 붉은 소라를 감목관에게 선물로 바치게 된다. 감목관은 그것으로 술잔을 만들어 애용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동구지역 사람들은 울릉도로 자주 건너갔으며, 지방관은 그것을 묵인을 해 주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이처럼 동구의 어부들이 멀리 울릉도로 자주 도해하였음을 알 수 있는 시로는 ‘어풍대’도 있다.
‘돈대(墩臺) 바깥의 동(東)으로는 넓은 바다 펼쳐지니 돛단배를 타고 가도 끝이 없네. 다만 돋는 해만 볼 수 있을 뿐인데 울릉도에 이른 사람이 있다는 소문도 있네’  라고 하고 있다.
 
전복 껍질.

위의 ‘어풍대’의 시에서는 울릉도에 이른다는 소문만 들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 시를 지을 당시에는 울릉도로 도해하는 어민들을 직접 만나 보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찌되었던 이러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았을 때 울산 동구 사람들은 울릉도로 많이 도해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전복을 채취하거나 향나무나 대나무도 베어 왔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위의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울릉도와 울산 사이에는 인연이 많은 곳이었다고 말 할 수 있다. 한편, 울릉도 안용복의 어머니가 울산 방어진에 있었고, 그는 박어둔을 비롯한 여러 명의 울산 사람들과 함께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게 된다. 이것 또한 울산과 울릉도와의 인연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것이다.

*이 콘텐츠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