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 막론하고 이어져온 ‘살기 좋은 곳’ 찾기 
‘택리지’에선 합천·구례·전주 등 길지로 꼽아
전국서 난개발 중인 요즘 길지 찾기 더 어려워

 

한석근 향토사학자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어디서 뿌리내려 살면 좋을까?”를 고민해 왔다. 좋은 곳 즉, ‘길지(吉地)’에 산다는 것은 곧 축복이며, 삶의 행복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동분서주하기도 했다.

일찍이 고운(孤雲) 최치원은 가야산 홍류동을 찾아들어 해인사 골짜기에 농산정(籠山亭)을 짓고 은둔해 살았다. 뿐이던가? 벼슬길에 올랐다가 당쟁에 휘말려 관직을 빼앗기고 낙향 하거나 자연에 귀의하고자 찾아드는 곳이 대개 산이거나 인적 드문 강가였다.

조선 후기의 실학(주자학)을 선행하던 퇴계와 남명이 그러하다. 둘은 동시대를 살았던 나이 동갑이었다. 퇴계 이황은 나이 70세가 되던 해 청량산 청량사로 들어가 은거했고, 남명 조식은 지리산 산청제에 들어가 여생을 보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낸 조선의 두실학자를 ‘동퇴계 서남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울산에 명당이라 일컫는 두 곳이 있다. 울산 중구 유곡동의 입화산(立火山) 자락이 그렇고 울주군의 웅촌면 돌내(石川)마을이 명당이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 현재 유곡동은 혁신도시에 편입돼 신도시의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으나 입화산은 여전히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돌내마을은 제상이 나올 길지이며, 한서동온(寒暑冬溫)의 살기 좋은 농촌이다. 지난 시절 이후락 같은 출중한 인물이 태어난 곳이다. 이같이 큰 인물이 난 길지는 사람이 살아가려면 필요한 농토가 비옥해 곡물이 풍부하여 인심이 좋다. 그래서인지 돌내마을엔 해가 거듭될수록 주거를 옮겨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고 시골마을 치곤 활기를 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팔도강산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은 어느 곳일까. 이미 18세기 때부터 우리나라의 살기 좋은 명당을 찾아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며 산과 들녘, 강변과 해안 두루 살펴 책을 쓴 사람이 청담(淸潭)이다. 그는 실학자로 일찍이 ‘택리지(擇里志)’란 책을 썼다. 이중환(1690~1756)은 남인 계열의 명문과 출신 선비였다. 23세에 과거 급제해 촉망받는 서른 안팎의 관료였으나 불행하게도 30대 중반을 넘기면서 당쟁에 휘말려 관직이 순탄하지 못했다. 그런 와중에 서른여덟 살 때 ‘이인좌의 난’에 휘말려 반역죄에 연루돼 관직을 내어놓고 조정에서 쫓겨났다. 

그 후 청담은 어디에도 기대지 못한 채 떠돌이 신세가 됐다.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어디로 가야 굶지 않고 살 수 있겠는가?”를 고민하다 책을 쓰기로 작심했다. 전국의 명산대천과 농어촌을 두루 돌아다니며 사람이 편하게 삶의 둥지를 틀 곳을 찾아냈다. 발품을 톡톡히 한 덕에 ‘사대부가거처(士大夫可居處)’ 란 제목이 처음 낸 책 제목이었다.

청담이 책을 내자마자 입소문을 타고 각처에서 책을 구하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택리지에는 우리나라 지리에 대한 사람들의 궁금증을 속 시원하게 풀어줄 내용이 서술돼 있었기에 더욱 인기가 높았다. 

‘택리지’는 우리나라의 경남 합천과 전남 구례, 전북 전주와 대전 유성, 경북 하회 같은 곳을 이상적인 살만한 곳으로 꼽았다. 또한 국토의 아름다운 곳이라 찬양한 곳이 강원도 동해안이었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이 지역에 많은 유람객, 피서객이 몰려든다. 또한 마지막 부분에는 “이젠 조선 팔도 전체가 각박해져 점차 살 수 없는 땅이 되어 가고 있다”고 한탄하는 구절이 적혀있다.

과연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살곳없는 황폐한 땅으로 변했는가? 사실 그렇기도 하다. 전국 어느 곳을 가 봐도 난개발과 지하수 천공작업으로 벌집을 쑤셔놓든 멀쩡한 곳이 없다.

내 마지막 “여생을 보낼 곳은 어디가 좋을까?”를 생각하며 주위를 휘돌아 봐도 마음 붙잡고 몸 눕힐 길지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 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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