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 삼호 박인숙 대표는 “히말라야 등반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했다”고 말했다. 임경훈 기자  
 
   
 
  ▲ 네팔 랑탕 간젤라피크 정상에서 (주)삼호 박인숙(왼쪽) 대표가 대원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간젤라피크 정상을 향해 오르는 박인숙 씨와 그의 원정대원들.  
 
   
 
  ▲ 빛 하나 없는 야밤이지만 히말라야 정상을 위해서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  
 
   
 
  ▲ 미국 알래스카 데날리에서의 박인숙 씨.  
 
   
 
  ▲ 박인숙 씨는 해외원정때마다 70kg짜리 배낭을 짊어지고 한계에 도전하고 있다.  
 

여기 울산 사람들이 있다. 이들 사는 이야기는 빠글빠글 끓여낸 된장찌개처럼 진하거나, 제철 맞은 복숭아처럼 달콤하거나, 해콩으로 만든 두부처럼 담백하다. 때로는 막 쪄낸 밤고구마처럼 퍽퍽하기도, 덜 익은 귤처럼 새콤하기도, 진하게 내린 커피처럼 쓰기도 하다. ‘인향만리’(人香萬里), 사람의 향기는 만리를 간다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향기를 남기게 될까. 울산에서 전기공사업을 운영하며 히말라야 등반으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 (주)삼호 박인숙 대표를 만나봤다. <편집자주>



#군인과 경찰을 꿈꿨던 당찬 여학생

울산 북구 강동이 고향인 박인숙(54) 대표는 원래 군인 또는 경찰이 되고 싶었다. 어릴 때부터 뱃일하는 아버지를 따라 스스럼없이 노를 젓고, 대차게 경운기를 몰기도 했고, 산으로 들로 나가 자전거 타기를 즐겨했을 만큼 대장부 기질이 강했다. 클 때부터 2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나 형제들 사이에서 치인 것도 한 몫 했다. 그는 “평소에도 여자는 부엌에서 밥하고 청소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활동적이고 생산적인 걸 하고 싶었다”며 “한마디로 무서울 게 없는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꿈꾸던 경찰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한 뒤, 군인이 되기 위해 응시한 시험에 1차 합격. 잠시 휴식기를 가지며 들어간 회사가 박 씨의 인생을 바꿔 놨다. 1988년 당시 울산의 한 전기회사에 들어가 경리업무를 봤는데, 10개 월 가량 근무하면서 지금의 남편을 만나 전기사업일을 본격 배우게 됐다. 그는 “전기를 배우다보니, 여자와 남자로 구분해야하는 분야도 아니고 살면서 꼭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창 일만 보고 달릴 때는 현장 쫓아다니기 바빴다. 공사 자재를 직접 운반하고 입찰 과정에 적극 참여하는 등, 그야말로 당찬 여성이었다. 현재는 사업 동반자인 남편과 함께 30년 가까이 (주)삼호를 운영 중이다.

#‘나’를 찾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정한 ‘산’

“겁 없이 세상에 덤벼들다보니, 어느 순간 ‘나’를 찾고 싶어진 순간이 왔다. ‘나는 누구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 씨는 자신의 인생에 산(山)을 새기게 된 계기를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21살 때 설악산 정상에 처음 오른 후, 산의 맛을 알아버렸다. 시작은 소소했다. 집 뒷산을 시작으로 울산을 비롯한 전국의 산들을 취미로 타기 시작했다. 그는 “늘 앉아서 일을 하다 보니, 현장에서 필요한 에너지가 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이에 몸을 혹사시켜서라도 건강하게 만들어보자는 생각에, 평소 하고 싶었던 등산을 선택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박 씨가 한 가지 특별한 마음으로 산을 타게 된 이유는 따로 있다. 자주 아팠던 2살짜리 아들이 엄마와 함께 등산을 다니면 건강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었다. 아픈 아이를 데리고 험한 산을 오르는 강한 엄마였던 그는 산에서 소리 내 운적도 많다. 그는 “아이를 데리고 산을 다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애 힘든데, 왜 산에 데리고 오냐’며 입을 데기도 했다”며 “자연을 보고 신기해하고 좋아하는 어린 아들과 악착같이 함께 했던 순간은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먹먹하고 추억이다. 현재 아들은 건강하게 자라 영국에서 대학공부를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를 품에 안다

‘눈물’만 줄줄 흘렀다. 히말라야 정상에 오르자 머릿속은 ‘백지’ 상태였다. 뒤를 돌아보니 무수히 많은 발자국들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박 씨는 지난해 11월26일~12월7일 사이에 네팔 랑탕(Langtang)에 위치한 해발 5,672m ‘간젤라피크’ 정상을 밟았다. 해외원정에 앞서, 한국에서 18명의 대원들과 함께 1년6개월간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나의 한계에 도전하고 끝까지 해냈다는 생각에 그저 좋았다”며 “내려올 때는 정상이 눈에 아른거리고, 후회할 것 같아서 뒤도 안돌아보고 내려왔다”고 말했다.

박 씨가 전문산악인으로 거듭나게 된 건, TV에 나오는 눈 덮인 알프스산맥에 반해 설산(雪山)에 대한 로망이 생기면서부터다. 그는 2007년부터 상업(기술)등반에 본격 도전, 등산학교를 다니며 전문산악인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겨울 산에 설동을 파고 들어가 비박하는 건 기본이었다.

박 씨의 히말라야는 이번 간젤라피크가 처음은 아니다. 히말라야만 이미 8번을 다녀왔다. 2002년 안나푸르나를 시작으로, 2009년 아프리카 킬리만자로, 2010년 스위스 융프라우, 2011년 호주 코지어스코, 2016년 미국 데날리 등 5대륙 총 13번의 해외원정 경험이 있다. 이중 데날리는 그에게 설산의 아름다움을 알게 해 준 넘버원 산이다.

#‘죽지 말자’고 다짐하는 순간의 연속

고소가 없는 박 씨는 해외원정할 때 한 번도 산소호흡기를 메고 간 적이 없다. 신발 무게만 6kg, 70kg짜리 배낭을 챙겨 메고 묵묵히 산을 오른다. 하지만 위험과 죽음은 늘 함께 했다.

4년 전 알래스카 맥킨리(6,194m) 정상을 앞둔 베이스캠프에 머물고 있던 그는 급작스런 통증을 느꼈다. 복부 아래에 혹이 올라오며 부풀어 맹장인 줄 알았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당시 원정대는 포터와 쿡이 없던 상황이었고, 식량을 담당했던 그의 역할이 컸던 상황이었다. 그는 “그때 대장이 더 이상 걷지 말고 쉬라고 했지만 대원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었다”며 “찢어지는 고통이었지만, 안 걸어가면 병원도 못가는 상황이었다. ‘죽지 말고 내려가자’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가장 불행한 기억 중 하나”라고 말했다.

#산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서 산이 좋다고 말하는 박 씨였다. 안 꾸며도 되고, 반찬 고민 안 해도 되고, 야크 집에 들어가서 잠만 자도 되는 등 자연 그대로 지낼 수 있는 게 산의 매력이라고 단언했다.

박 씨는 ‘청소년 백두대단 숲체험 강의’ ‘울산의료봉사대’ 등 사회활동도 적극적이다. 그는 “울산에서도 훌륭한 산악인이 많이 배출되기 바란다. 특히, 여성을 던져버리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자리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며 “울산에서 출발한 여성산악회가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전문산악인 단체로 성장하는 기회가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어 “힐링에 그치는 등산이 아니라, 도전의식을 불태울 수 있고 안전한 등산문화를 많은 이들이 배워서 함께 했으면 한다”며 전문산악인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냈다.

끝으로 박 씨는 오는 25일 강원도 대관령목장에 위치한 소황병산에서 마음 맞는 대원들과 동계훈련에 돌입할 계획이다. 그는 “산을 타면 시인 아닌 시인이 되고, 멋진 소설가가 될 수 있다”며 “산을 바라보며 가고, 산은 우리를 버리지 않는다. 나이 상관없이 안 아플 때 열심히 돌아다니자”고 말했다.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