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어진 꽃바위에 있었던 천연목욕탕 '큰거랑'  
 
   
 
  ▲ 일산에 있었던 천연목욕탕'깐추박거랑'(1936년)  
 
   
 
  ▲ 1915년 나카베에 의해 방어진에 만들어진 수산회사 하야시카네 직원 전용목욕탕은 '장수탕'으로 바뀌었다.  
 
   
 
  ▲ 호계 샘물탕.  
 

“울산의 최초 목욕탕은 1910년대 일본인 거주지인 방어진에서 시작됐다. 1960~70년대에는 울산의 어린이들은 여름이면 태화강 모래섬으로 건너가 소를 먹이고 목욕을 했다. 강변에는 땅콩밭을 중심으로 부드러운 모래가 많아 목욕을 한 후에는 이 모래위에서 몸을 말리기도 했다“

그 옛날 울산사람들의 목욕문화는 어땠을까?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목욕을 했을까?

울산사람들의 목욕문화를 연구한 결과가 나왔다.

울산광역시 문화원연합회는 최근 발간한 울산 향토사 통합연구지 제6호 <울산지역문화연구>를에서 목욕탕을 중심으로 이뤄진 울산사람들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글을 실었다.

울산에서 가장 먼저 목욕탕이 만들어진 곳은 방어진이고, 일본인들에 의해서다.

장세동 동구지역사연구소장에 따르면, 1908년 <한국어업법>을 공포하면서 한국내 거주하는 일본인에 한해 어업권의 인허가를 허가했다. 이때부터 방어진에는 일본어민의 이주가 많아져 생활문화시설이 늘면서 돈을 내고 목욕을 하는 공중목욕탕인 ‘전탕’(錢湯)이 생겨났다.

전탕이 보급되면서 방어진에는 목욕이 일반화됐다. 19010년에는 목욕탕이 세 곳이 있었고, 1915년 9개로 늘면서 당시 목욕탕은 방어진의 도시문화를 가늠하는 지표가 됐다.

박중훈 북구문화원 이사는 북구에서는 목욕에 대한 옛기록이 찾기 힘들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학성지>에 보이는 '무릉약천'의 기록이 유일하며, 1931년 경주에서 고향 송정으로 돌아온 박상진 의사 댁의 목간통이 목욕과 관련해 수집한 가장 이른 시기의 사례로 보고 있다.

최명훈 중구문화원 이사에 따르면, 중구 사람들은 태화강외에도 목욕을 하기 위해 병영 산점샘에도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산전샘을 식수로 이용했을 뿐 아니라 여름이면 등물을 하기도 했고 겨울에는 아낙네들이 아예 발을 물에 담근 채 빨래를 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는 울산의 목욕문화와 관련한 신문기사를 통해 울산사람들의 목욕문화를 들여다봤다.

1931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울산읍의회 예산 2만 9천원’이라는 기사에는 “울산읍의회는 을산읍의 금년도 중요사항을 의결했는데 올해 총 예산액 2만 9천원으로...재래공중목용탕에 보조를 해왔던 60원도 전액 삭감이 불가피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울산 고찰 중에도 오래전 스님들이 목욕을 했던 고찰이 있어 관심을 끄는데 웅촌 운흥동천에 있는 운흥사 석조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기도 전 몸을 정화시키기 위해 스님들이 목욕을 했던 곳으로 추측하고 있다.

장 이사에 따르면, 울산에서는 선거 때면 후보자들이 유권자들을 대거 부산, 경주로 데리고 가 목욕을 시켜 흔히들 울산 선거를 ‘목욕선거’, ‘봉투선거’라고 말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1990년대 초부터 2000년 중반까지 울주군 언양에서 수성탕을 운영했던 신동익 전 울주문화원부원장은 “언양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마을 앞으로 흘러내리는 남천내에서 주로 목욕을 했다. 남천내는 태화강의 상류로, 가지산에서 흘러온 물이 매우 깨끗했을 뿐 아니라 수량도 많아 목욕을 하기에 좋았다”며 “언양은 2000년대 들어 인근에 온천이 많이 개발되면서 많은 목욕탕들이 폐업했다”고 회고했다. 고은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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