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배호 화백

죽산 조봉암(1893~1959)과 약산 김원봉(1898~1958)은 일제 때 동경유학생으로 사회주의에 물들었으며, 항일 투쟁을 벌인 동갑내기 청년이었다. 조봉암은 1959년 7월 남한에서 간첩죄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처형됐다. 대한민국을 버리고 북한을 선택한 김원봉은 1958년 국제 간첩으로 몰려 김일성에 의해 숙청 당했다.

서대문형무소 사형 집행장의 버드나무에 진귀한 새가 나타나 슬피 우는데 이것이 ‘봉암새’ 혹은 ‘죽산조’라는 전설이 전해졌다. 그 주인공 죽산은 광복 후 공산주의와 결별하고 제헌 국회의원, 초대 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지냈다. 제2대와 3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해 모두 2위를 했고, 제3대 선거에서는 216만 표 넘게 얻었다. 그의 간첩죄 누명은 이승만 정권을 위협한 괴심죄였으며 사형 판결에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나 2011년 1월 대법원은 재심재판에서 52년 만에 무죄를 선고 했다.

한편 자진 월북한 김원봉은 1948년 9월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해 국가 검열상과 노동상,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의열단 단장을 지낸 그였지만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배제돼 왔다. 김원봉이 대중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영화 ‘암살’(2015년)과 ‘밀정’(2016년) 덕분이다. 여기에 김원봉의 현상금이 100만원으로, 백범 김구의 현상금 60만원보다 많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김원봉 열풍이 불었다.

하지만 김원봉의 6.25당시 행적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다.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장준하가 전한 모습은 영화와는 너무 다르다. 그럼에도 국가보훈처가 북한 정권 수립 공신인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보훈단체들과 정치권은 일제히 반발했다. 김원봉은 김일성에게 연안파 숙청 때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6.25 전후로는 남파 간첩을 파견하기도 했던 명백한 6.25전범이라는 오점을 지울 수 없다. 조봉암, 김원봉이 남과 북에서 맞은 비참한 최후는 현대사의 비극이다. 하지만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서훈하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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