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의 씨앗, 눈’ 시인묵객들 감성 자극하는 소재
박목월 시에 ‘순정’ 표현․김진섭 수필에서 눈 예찬
땅속으로 녹아들어 곧 오실 봄에 푸른 생명 돋게해

 

이병근 시인

1월이 다 가는 날 울산에 첫눈이 왔다. 그것도 대설주의보가 발령되고 한파 소식도 동반했다. 각종 매스컴에서는 첫눈 소식과 함께 눈이 온 뒤 따르는 사고 예방에 조금도 허술함이 없게 하자는 뉴스로 한 목소리다. 설정(雪情)의 반가움보다도 사고 유발자로 변하는 빙설이 걱정이다. 그러나 눈(雪)은 대기 중에서 일어나는 물리적인 현상으로 낭만적인 ‘기상 현상’이다. 꼭 동심으로 들뜨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으나 백발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가슴에도 아스라한 추억이 일게 한다.

‘눈’은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기운을 만나 얼어서 땅 위로 떨어지는 얼음의 결정체를 가리킨다. 눈을 표현하는 우리말로는 가랑눈, 가루눈, 도둑눈, 마른눈, 밤눈, 봄눈, 소나기눈, 함박눈 등 이외에도 많지만 이번에 내린 눈은 ‘진갈피’이다. 진갈피는 비와 눈이 섞어 내리는 ‘진눈깨비’를 충청도 이북, 강원도에서 주로 쓰는 방언이나 개인적으로 시구로 표현하기에 더 좋을 것 같아 선택해 본다.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순백의 아름다움으로 위안을 주는 흰눈(白雪)중에 그래도 ‘함박눈’이 절정인 것 같다. ‘함박눈’은 싸락눈이나, 가루눈처럼 초라하지 않게 굵고 탐스럽게 내리는 모양이 함박꽃 같다고도 하고 솜 같다고 해서 함박눈이다. ‘그녀가 은빛 칼로 무우를 자르고 있다/ 생손톱 다 빼 던져도 사랑 때문이라면/ 아픔 없을 것 같은 영하 30도의 순백/ 이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았던 동상이다.’ 라고 시인 강우식이 노래한다.

순백의 씨앗 눈은 시인묵객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더 없는 소재이다. 한국인이 즐겨 애송하는 시 중에 ‘이별의 노래’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는 ‘나그네’로 잘 알려진 서정시인 박목월 작이다.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에 사랑도 저물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산촌에 눈이 쌓인 어느 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시인은 얼핏 가을을 노래 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함박눈이 푹푹 쌓인 어느 두메 마을 초가에서 촛불을 밝히고 이별의 쓰라린 가슴속을 표현한 것일 것이다. 사실도 그랬다.

박목월 시인은 젊어서 자신을 따르는 여대생과 사랑에 심취하여 함께 지고지순한 순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고 한다. 둘의 사랑이 얼마나 다분했으면, 아내가 그들을 찾아가서 추위를 걱정해 남편과 여인에게 누비옷을 전해주고 갔을까? 몰래하는 사랑은 너무 깊고 애틋해서 하늘도 질투한다고 했다. 그리고 그런 사랑의 스토리가 그렇듯 그들의 짧은 사랑에도 시련이 찾아왔다.

여대생의 부모로 인해 애틋한 사랑도 끝을 맺는다. 원치 않는 이별을 하게 된 목월은 서울로 떠나기 전날 밤 이 ‘이별의 노래’란 시를 지어 사랑하는 여인에게 이별의 선물로 주었다는데, 그때 목월의 심정은 푹푹 쌓이는 눈처럼 눈물도 펑펑 쏟았으리라. 세월이 흘러 목월은 이미 남의 여인이 된 그녀를 찾아가서 차 한 잔 하는 것으로 그동안 못 다한 그리움을 무언으로 전하고 돌아와서 며칠 뒤 목월은 편안히 눈을 감았다. 한편 작곡가 김성태는 ‘이별의 노래’에 고운 선율과 호소력이 넘치는 곡을 더 해 남녀노소가 즐겨 부르게 되는 한국 가곡사에 길이 남을 서정가곡을 만들었다.

세상의 비속함과 그와 대조되는 눈의 아름다움을 찬양한 수필가 김진섭은 평범한 소재인 ‘눈’에 대한 사색과 성찰로 ‘백설부’라는 수필에서 순결무구한 눈의 속성과 눈이 인생에 가지는 의미를 통찰하고 눈을 의인화하였다. “백설이여, 잠시 묻노니 너는 지상의 누가 유혹했기에 이곳에 내려오는 것이며, 또 너는 공중에서 무질서의 쾌락을 배운 뒤에 이곳에 와서 무엇을 시작하려는 것이냐! 천국의 아들이요, 경쾌한 족속이요, 바람의 희생자인 백설이여, 과연 뉘라서 너희의 무정부주의를 통제할 수 있으랴.”라고 눈을 예찬하고 있다.

배내골로 넘어가는 배내재에 올라 조망되는 사위 산야에 쌓인 ‘울산 첫눈’의 흔적을 본다. 실로 오랜만에 보는 설경이지만 풍부하지 않아 아쉬움은 있다. 저 순백의 ‘씨앗’들이 녹아 땅속으로 스며들어 버리면 세상의 추악한 모든 것들은 또다시 실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순백의 씨앗은 땅속을 신성하게 하여, 이윽고 오실 봄에는 푸른 생명을 돋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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