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배호 화백

4번의 시도 끝에 성공한 가출, 6.25 전란의 와중에 미군 공사를 발판으로 건설회사를 세웠다.
500원짜리 지폐 한 장으로부터 만들어낸 세계 최대의 조선소, 오일 쇼크 와중에 이끌어 낸 중동 신화, 아산(峨山) 정주영(鄭周永·1915~2001)의 성공담은 하나같이 감동적이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그를 키운 것은 시련이었다.

4번째 성공한 가출 뒤에는 3번의 실패가 있었다. 자동차 수리업체로 성공하기 까지는 화재로 공장을 잃고 일제의 기업정리 명령으로 사업체를 빼앗긴 시련이 있었다. 시련이 있었기에 더욱 최선을 다했다. 거듭된 도전과 시련 끝에 빛나는 성공을 이루었다.

1915년 11월 25일 지금은 북한 땅인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6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19세 때 서울의 쌀가게 복흥상회에 취직했다.

1938년 ‘경일상회’ 개업 후 자동차 수리업체 현대자동차 공업사를, 현대토건사(현대건설 전신)를 차례로 설립하고 전후 복구 사업에 뛰어들어 한국 경제의 전면에 나섰다.

1998년 6월 16일 그의 판문점 ‘소떼몰이’ 북한 방문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2001년 3월21일 오후 10시 86세의 일기로 서울 중앙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만약 그가 첫 번째 가출에 성공해서 원래 뜻대로 노동판에서 성공했다면 과연 그의 성공은 어디까지 였을까.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지레 겁을 먹고 중동 건설 현장에 진출하지 않았다면 현대건설은 얼마나 더 성장할 수 있었을까. 이 같은 가정에 대해 쉽게 답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정주영의 성공 비결이다.

“사주팔자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면서 이런저런 때에 어떻게 대처 하느냐에 따라 성공, 실패가 판가름 나는 것이다” 오늘까지 전해져 오는 그의 유훈(遺訓)이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고 외친 거인(巨人)이 떠난 지 18주기를 보내면서 그의 족적이 더욱 커 보이는 것은 왜일까.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한 채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경제는 ‘영원한 도전자’ 정주영을 다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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