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시 남구 남화동 옛전경(왼편)  
 
   
 
  ▲ 울산시 남구 남화동 옛전경(오른편)  
 
   
 
  ▲ 1965년~67년 무렵 용잠.남화.용연일원 항공사진  
 
   
 
  ▲ 울산 남구 남화동 옛터비  
 
   
 
  ▲ 박채은씨가 수년간 답사해 직접 만든 심포마을 지도. 해변을 따라 위치한 각 집들의 주인들의 이름을 나열했다.  
 
   
 
  ▲ 박채은씨.  
 
   
 
  ▲ 남화동 주민들의 식수원이자, 공동우물이었던 오가네샘.   
 

세죽, 성외, 황암, 용연, 남화, 용잠, 내해마을이 남화동

가리봉수대 있던 봉대산 아래 '오가네 샘' 식수원

바닷가 쪽 남화마을에 동해발전 들어오면서 서둘러 이주

친구와 함께 대공원 옆 '공원마을' 구획정리사업 주도

일찍 이주 마을기금 없어 고향사람 모이지 못해 아쉬워

남화동은 바닷가 사는 사람이라 해서 갖다 붙인 이름이 해칠방이라. 바닷가 일곱 개 마을이거든. 처용암이 있는 황성동 세죽 마을, 그 옆에 선경인더스트리 있던 성외, 황암, 용연, 남화, 용잠, 또 장생포 건너편에 있는 내해 마을, 이 일곱개 마을을 해칠방이라고 불렀다고. 대현중학교 가니까 여천동 이쪽 지역 애들이 “야, 느그는 해칠방 애들 아니가?” 그래.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지. 집에 와서 친척 형님한테 “내륙지역에 있는 대현, 여천 이쪽 애들이 우리 보고 해칠방 애들이라고 되게 멸시하는 그런 언사를 쓰더라. 그건 무슨 말이에요?” 하고 물었지. 바닷가 쪽에서 고기 잡고 사는 무식하고 험한 일을 한다는 그런 뜻이래.

마을에 공장이 들어오기 전에는 다 찌그러져가는 집이라고 하더라도 자기 집이 있었지. 이주하기 전에는 농사만 짓는 집은 얼마 안 됐지. 우리 마을은 농지가 별로 없잖아. 용연, 천곡 이 일대에 논이 많았지. 가리봉수대가 있던 산이 봉대산이야. 봉수대가 있었지.

산 밑에 있는 오가네 샘이 남화동 주민들의 식수원이고, 공동 우물이지. 오가네 샘에 물 뜨러 간 적 많지. 좀 컸을 때는 물지게 한두 번 져 나른 적이 있고. 우리 집사람이 고생 많이 했어요. 철거 직전에 결혼해서 거기 살았으니까. 전기도 71년도 그때까지 안 들어왔는데, 수도가 어디 있어. 마을마다 또 집마다 우물이 있었는데 우리 집 우물은 식수로는 안 쓰고 그냥 허드렛물로 쓰고 이랬어요. 바닷가에 접해있다 보니까, 염도가 있어가지고 짜다 아잉교.

남화동에 동해전력이 들어올 때야. 울산화력본부가 원래는 동해전력이야. 화력발전소 이런 건 바다 근처라야 되잖아. 그래서 우리 동네 옆을 선택하게 된 걸로 내가 알고 있고. 용잠 끝나는 부분이 화력발전소 들어올 자리라. 동해전력에 우리 동네 끄트머리 다섯 집이 날아갔지. 다섯 집이 그 때는 갈 데가 없었어. 다 여기서 바다에서 뭘 해 먹고사는 사람들이라, 이쪽으로 집을 많이 지어왔어요. 남화동 안 벗어나고, 남화동 권역 내에 다른 지역에 옮겨갔다고. 우리 동네가 백스물여덟 집이지. 근데 다섯 집이 와서 백서른셋 집이 된 거지. 전체 인구가 한 4~500명 정도 이렇게 보면 안 되겠나.

62년도에 울산시가 되면서 공단이 됐잖아요. 그땐 공해라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공해가 생길 거라는 예측도 못 했고, 단지 ‘공장이 들어오는구나.’ 이 정도 생각 밖에 할 수 없었어. 그저 ‘농사 짓던 사람들 직장이나 하나 만들어주지.’하고 생각했어요. 근데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 거예요.

마을 사람들이 이주할 택지 개발을 1976년 10월부터 시작을 했죠. 땅 밀고 공기가 빠듯했지만 빨리 철거하라고 그러니 난감해요. 이 사람들은 주야로 밀어붙이고, 그때 이유수 선생이 주택과장 하면서, 이거 담당하는 총괄과장이었거든. 시에서도 빨리 공사가 진척이 돼야 이주사업을 마무리할 거 아닌가베. 이유수 선생이 여기 나와 가지고 우리하고 같이 다니고, 진두지휘도 하고. 우리 집이 거의 마지막에 나온 부류인데, 울산여상 위에 택지를 조성해서 집을 짓고 하는 그 기간이 필요하잖아요. 국민주택자금을 76년 이때 받았어요. 여상 위에 28세대가 가기로 하고 그때 한 120만 원 받았거든. 1년 거치 15년 상환이라. 그때 상당히 컸어요. 그때 시청 뒤에 대지 한 50평 기준으로 하고, 슬라브 건물 22평짜리가 350에서 400만 원 했거든요. 1년은 공짜, 2년 차부터 15년 동안은 원리금 균등 상환으로 원금하고 이자내고. 이자가 부담됐지.

우리가 울산여상 위로 갈 때, 그 일대가 다 산이다. 우리가 최초로 조합에서 그 땅덩어리를 사서 밀었다 아잉교. 택지를 조성해 짤라가 우리 필요한 것만 놔놓고 나머지는 다 팔고, 비용 들어간 거 보태가 팔았어요. 그 중에서 스물여덟 필지만 우리가 차고앉았지. 나머지는 우리가 가지고 있을 수가 없단 말이야. 우리가 가장 좋은 자리, 스물여덟 가구 앉을 자리 만들어놓고. 이 외에는 전부 번호를 매겨가지고 평당 얼마 해가지고 팔았지.

친구 둘하고 나하고 셋이 했는데 한 친구는 총괄하는 조합장이지. 남화용잠이주주택조합 이래 됐는가? 공식 명칭이 그런가 싶다. 남화동 사람만 온 게 아니었어요. 남화동 한 열여덟 세대, 용잠동 한 열 세대. 동네 사람 다 같이 하지 못한 건 학산동 새치에 이사한 가구, 대현동 주민센터 있는데 그 뒷 골짜기에 한 열 가구, 구 덕하 도로 철길 있는데 거기 수암동 골짜기에 한 네댓 가구가 갔지. 아름아름 자기들끼리, 친인척 따라서도 가고, 아니면 한 담 새에 살았던 동네 사람들이 함께 이주를 했거든요. 조합에서 나는 순수하게 현장 맨. 땅 밀어붙이고 집 짓고 하는. 작업지시 같은 거는 내가 했지. 그런 일은 처음부터 타고난 사람이 있습니까? 하다 보니까 되는 거지. 그때 내가 서른 두세 살 됐나?

세 친구가 한동네에서 태어났고, 같이 컸기 때문에 서로가 성격을 다 잘 아니까. 사업을 떠나서 우리 집 지어서 간다는 생각으로 했지. 같이 이주한 동네 사람들은 따라온 거지. 우리 어른들 살아온 생활 방식을 보고 믿고 따라온 거지. 동네 사람들이고. 그러니까 돈도 맡기고, 도장도 맡기고. 그때는 정서가 또 그랬어요. 몇 사람들은 보상수령 통지서하고 통장하고 다 맡겼어요. ‘우리 보상이 이것뿐이 안 되니까 여기 맞춰서 집 지어주가.’ 하고 이런 식으로 다 했지. 목수는 내가 아는 사람인데, 부산 사람이고, 내가 총각 때 자기 집에 자취하고 있을 때 알았던 그분이 반구동 구획정리를 한 사람이라. 돈을 엄청 벌어갔어.

마을 명칭이 공원 마을이라고 되어 있거든. 쭉 올라가다 보면 공원마을 입구에 표지석이 있어요. 그때 우리 생각에, 이거 끝나면 놀 수도 없고, 이 나이에 뭐 직장에 들어갈 수도 없는 문제고. 그래서 장사라도 해야 안 되겠느냐. 안 그러면 장사 집을 지어서 세를 주더라도 해야 안 되겠나, 이런 생각이었어요. 부지 배정은 그냥 번호 매겨서 제비뽑기하자. 재수 좋은 사람은 좋은데 앉고, 안 그런 사람은 골짜기에 앉고. 이런 식으로 했다 아입니까?

우리 조합원 28명 조합원들한테는 입찰을 붙인 거지. 다른 외지 사람 들어오면, 우리가 여기 못 앉잖아. 입찰하기로 우리가 예정가를 만들었지. 가격을 매기면서, 친구들 보고 ‘나는 여기 할란다.’, 일종의 담합이지. ‘내가 더 보태갖고 여기 할란다.’ 이라면 ‘그러면 그래 해라. 니가 그동안 현장에서 더 욕봤다 아이가. 업자들도 데리고 왔지를...’,‘다른 조합원들이 반론을 제기 안 하겠냐?’고 하니까, 조합장 친구가 ‘내가 책임지꾸마.’ 지가 집안사람들하고 또 용잠에 결혼해서 간 자기 사촌 누나들 쪽으로 해서 많이 데리고 왔거든. 하하하.

그 친구 그냥 조합장 시킨 거 아니고. 28명 중 자기가 한 아홉 세대를 데리고 왔다고. 그러니까 ‘니가 조합장 해라. 니 보고 온 사람들이, 우리가 말로 하면 말발도 안 서나.’ 이런 논리로 해가 그 친구를 조합장 시킨 거지.

이주를 하게 된 거는 오로지 공해 때문이지. 아황산가스 분진. 그때는 석탄을 땠거든. 공장 가동과 동시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데, 공장 가동이 한 70년도 됐을 거야. 공장 터 닦은 시기부터 하면 십 년이 지났고, 공장 가동부터는 6~7년 시달린 거지. 처음에는 몰랐는데, 뒤에 농작물하고, 산의 소나무 숲이 요새 소나무 재선충 매로 말라서 누렇게 되고, 또 바다에 미역도 안 달리는 거예요. 농사 못 짓지를, 사람 생활도 제대로 못하는 거라. 요새처럼 환경단체가 있고 이랬으면, 언론에서 이슈화시켜 보도하고, 데모하고 이래 할 건데, 그때는 먹고살기 바쁠 때이고, 우리 조상들 평소의 품성이 있잖아. 좀 안 나아지겠나! 이런 말도 안 되는 기대감 때문에 기다린 거지. 동해전력이 가동되면서 지역주민들에게 주는 큰 혜택은 없지. 단지 몇 사람한테만 혜택이 가지. 밖에서 기술자들을 모아서, 채용을 해서 오니 마을 사람 해봐야 경비나 하고. 경비가 최고급 직장이지. 피해만 몽땅 둘러매고 고향을 버리고 쫓겨나온 거지. 그래 봐야지.

향우회가 있었지. 지금은 향우회라기보다도 상포계, 일종의 상조회인데 옛날에 상포라고 그랬다. 안 좋은 일, 궂은일 일어나고 하면 두레형식으로, 품앗이 형식으로 해주는 그런 식으로. 처음에는 향우회가 있었어. 한 78년도인가 79년도부터 향우회가 있었다. 한전 마당에서 모여가지고 공차기도 하고, 한전에서 주는 음식 가지고 노래자랑도 하고, 향우민들이 모여서 그래 놀곤 했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면서 유지가 안 되더라고. 또 중간에 못된 놈이 향우회 돈도 잘라 써버리는 바람에 안 되더라고. 젊은 애들이 부모님 초상 당하면 품앗이 하듯이 돕는다고 상조회를 만들어가 그게 현재 유지가 되고 있어. 나는 장사한다고 처음부터 참여를 못 했지. 나는 무거동에 와 있으니까. 그때는 농장도 하고 있었고, 시간이 그래가 못 했고, 나는 동생들이 또 많잖아. 층층이 있다 보니까 참여하는 동생도 있었어.

용연이라든가 황성 이런 해칠방 마을은 우리보다 늦게 이주 했잖아요. 공단 들어서고 1990년대 중반부터 나왔는데, 그때는 공해 이 문제가 사회 이슈화되어 가지고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잖아. 그때 우리 동네 전철을 이 사람들이 알고 있렀던 거야. 마을 보상을 받아가 전부 나눠 가져 동 재산이 없으니까 기존 동민들 화합이 안 되는 거예요. 용연, 황암, 이런 데서는 ‘아, 저기 심포 사람들이 이렇게 해가지고 향우회도 깨지고 그 사람들이 화합이 안 되고 있다. 우리는 동네 재산 팔아먹지 말고, 나눠 먹지 말고 존치를 시키자.’ 이렇게 마을 사람들이 회합을 해 결론을 얻은 거야. 그래 이 사람들이 철거 무렵에 마을 제당 천도재 할 때도 거창하게 했잖아. 우리는 조그맣게 했지만. 그 사람들은 돈이 있으니까 행사도 크게 하고, 지금도 향우회가 유지되는 거예요. 우리는 향우회가 깨진 것은 종잣돈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안타깝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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