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배호 화백

바둑은 초기 인공지능(AI) 연구의 핵심 모델로 출발한 뒤 AI의 덕을 가장 많이 본 분야로 꼽힌다. 학문분야와 달리 승패와 선악(善惡)이 선명하게 갈리는 바둑의 특성이 한 몫 했을 것이다. 하지만 수 천 년 간 쌓아온 이론이 하루아침에 AI에 의해 폐기되는 수모도 함께 겪고 있다. 종전의 우형(愚形)·악수·완착이 AI에 의해 복권(復權)되거나 또는 그 반대의 경우가 수시로 등장한다.

꼭 3년 전인 2016년 3월 9일. 전 세계인은 충격에 휩싸였다. 어떤 이들은 공포까지 느꼈다. 예상을 깨고 구글 딥마인드의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상대로 첫 승을 거두었다. 알파고의 승리는 AI의 비약적인 발전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알파고가 처음 공개됐을 때 사람들이 놀란 것은 AI의 월등한 실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프로기사들에겐 AI가 바둑의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을 파괴했다는 게 더 큰 충격이었다. 그동안 바둑에는 좋은 수나 나쁜 수에 대한 정형이 존재했다. 하지만 알파고는 이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수를 자유롭게 선보였다. 초반부터 3·3에 침입하는 수가 대표적이었다.

AI가 고정 관념을 파괴한 덕분에 경직됐던 바둑이 유연해졌다. 하지만 3년이 지난 지금은 AI의 몇몇 수법이 바둑의 정석으로 자리 잡았다. 초반 3·3침입이 가장 즐겨 쓰는 포석이 된 것이다. 처음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독특해 보였던 AI특유의 기법이 가장 흔한 수법이 되고 말았다.

한판 바둑에서 가장 막연하고 난해한 부분은 초반 포석이다. 많은 프로기사가 AI등장 후 그 어려움을 덜어냈다며 좋아한다. 하지만 초반 절충의 대부분이 AI에 의해 정형화, 고착화되면서 바둑 고유의 묘미가 사라졌다는 탄식도 나온다. 1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정석(定石)은 인간 고수들의 고뇌의 집적체로 여겼다.

정석은 이제 AI작품 중 고르는 ‘선택과목’이 됐다. AI시대에 프로기사들은 기계가 도저히 따라오지 못할 인간적인 면모를 어필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내야 한다. 우리 삶도 AI가 가르쳐 준 정석대로 살아가라고만 한다면 얼마나 삭막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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