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옛터비에 담긴 기억들 – 공단 이주민이야기
(7)황상호(1940년생)씨의 남구 용연동

미역과 해초·모자반까지 ‘없어서 못 파는’ 풍족한 용연 마을
정유공장·발전소 들어선 후 이주 시작… 30년만에 공장 가득
87년부터 향우회 시작… 이제 1년에 한두번 모이는 것도 어려워
고향이 공장으로 들어가 섭섭… 바닷가만 보면 고향 생각나

 

현대중공업 용연공장 인근에 조성된 소공원에 세워진 용연 옛터비.
황상호(1940년생)씨

공업 도시 되기 전에는 울산에서도 용연하면 살기가 참 좋은 동네였어. 바다가 있어 겨울에 노는 시간이 없는 거라. 미역하고 해초, 모자반하고 그게 내 나오고, 고기도 잡고. 미역은 없어서 못 팔아먹지, 자연산이니까. 그때는 양식을 안 하고 자연산뿐이니까 귀하거든. 이러니까 돈은 안 기럽지(아쉽지). 큰 돈은 안 돼도 생활하는 데는 괜찮았지. 그런데 고기 많이 잡아오면 많이 잡았다고 놀면서 술 먹고 노름하고, 못 잡으면 못 잡았다고 또 술 먹고 노름하니 나중에 보니까 맨날 지 자리야. 풍족하기는 한데, 뱅뱅이 다람쥐 돌 듯이 내내 쌓이는 게 없어.

 
# 동해화력발전소 건설 덕에 일꾼들 몰려와

공업 도시가 되면서 첫째 전기가 있어야 안 되는교. 그래서 동해화력 발전소를 젤로 먼저 지었는 거라. 요새는 포클레인 이런 걸로 하지만 그때는 손으로 하고, TNT(군용폭약)를 놔서 작업을 해. 갑자기 일꾼들이 몰려오니까 동네에 방이 없는 거라.

우리 같은 사람은 집이 있으니까 빌려주고. 소 먹이던 걸 소 안 먹이고, 새로 집을 개축해 대여섯 집 함께 살았지. 집이 너르니까 마당만 놔두고 방 넣을 수 있으면 다 넣은 거라. 부엌 하나, 방 하나 이렇게 해가지고 연탄 때고 했지. 그 때는 젊은 사람들 돈 벌러 많이 왔어. 신혼부부들이 많이 왔지.

공업지역이라 해놓고 수도도 안 넣어주는 거라. 전기도 우리 손으로 땡겼는 거라. 부곡까지만 들어오고, 해안 7개 부락에는 전기가 안 들어오는 거라. 그래가 그 당시 미역을 팔아 돈을 만들어 부곡에서 전기를 땡겼는 거라. 전봇대 세워가지고 전부 땡겼는 거라. 우리 돈으로 땡겼지. 돈만 주면 세워주는 거라. 몇 년 도인가 그건 몰라도 공장 세워지고 한참 뒤지. 70년도는 넘었지.
 

# ‘통일벼' 공급돼 심었지만 공해로 말라버려

발전소며 공장들이 들어서니 농사가 벼농사고, 바다 농사고 될 리가 있나. 통일벼 그 이바구 하면 말 다 못 한다. 통일벼가 나왔는 거라. 마을에 모종이 몇 가마니 나와서 쭉 분배를 했는데 공해 때문에 뺄가이, 한참 펴가지고 알 들라고 할 때 말라버리는 거라. 그래가 실패 했대이. 그 다음에 또 했는데 또 실패해 가지고 그 다음부터 못하겠다고 시에서 앞발 들어버렸다고.
 

용연동 옛 마을 위치도.

그래 보상은 탔지. 그런데 다른 품종이 왔다며 심어보라고 한 가마니 주는 거야. 내가 논 스물 몇 마지기에 심어놨더니 그거는 되기는 되는데, 그것도 곡식이 안 나대. 매상(수매) 다 돼버렸다 아이가. 그때는 매상을 100% 다 받아주는 거라. 그래 다 돼 버리고 쌀을 받아 먹었다커이. 남의 걸 받아먹었다고, 우리 걸 안 먹고. 품질이 떨어지지. 거의 껍데기 한 가지라. 상상해봐라. 껍데기 판이라. 그게 전부 3등도 안 돼.

얼마 안 있다가 울산시가 마을 공동어장을 없애 버렸어. 왜 그러냐면 그걸 놔 두면 어민들에게 보상해 줘야 된다 이거라. 정부에서는 벌써 안 모양이라.

고기는 잡아 먹되, 보상이 없는 거라. 소유권을 안 줘. 논 이런 거는 전부 개인 거라 그래 할 수는 없거든. 그래 공해 담당 부서가 있어. 여기 석유화학 안에 환경보전협회라고 알란가 모르겠는데 공해 내는 공장에서 보상금을 받아서 분배를 해서 주는 거라.
 

# 송암, 송해 부락 등 윗쪽부터 이주시작

용연동은 제일 위에 부락이 성암, 송해 부락, 그 다음에 새각단, 용연 이렇게 있었어. 이들 마을이 한 참에 이주지역에 들어가 버렸으면 괜찮았는데, 공장 1차 공사하면서 젤로 먼저 윗동네 없애버리고, 그 다음에 2차 하면서 또 없애버리고, 결국 도로 밑에 바닷가 사람들만 남아 있었어. 바다를 메운 거는 90년도, 마지막까지 버티던 사람들은 매립이 끝나면서 나오고 했지. 공장이 들어오고 시에서 나가라고 하니까 별 수 있나. 땅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순순히 승낙을 다 준 거라.

마지막 철거될 때, 그때 심완구 시장한테 '당신도 대현면 사람인데, 대현면이 없어졌으니까, 마지막 보상 아니가, 보상 그대로 해주가. 우리가 삼 십몇 년 동안 고생했는데, 보상 제대로 해주가.’ 이러니까 웃으면서 그건 안 되고, 감정해야 된다고 그러데. 억울했지. 그래도 정부에서 하는 일이니까 다 받아줄 수 밖에. 그래가 우리가 철거되면서 비석이나 하나 세워달라고 부탁했더니 애향비 하나씩 세워줬지. 그때 용연만 세워줬지. 시에서 돈 주는 거 가지고, 대현면 추진위원들을 만들어가지고 12개 자연부락인데, 대표자들이 한 부락에서 서너 명이 나와 가지고, 시장과 얘기해서 비석은 세워놨어. 거기 운동장도 크게 해놓으니까, 공장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운동도 하고. 하나 아쉬운 거는 우리가 시장하고 다 약속했는데도, 박맹우 시장이 국회의원 나가버리고, 비석하고 운동장은 해줬는데, 유물 전시관, 그건 안 해줬어.
 

용연동에 들어선 동해화력발전소와 70년대 일대 공장부지 공사 모습.

 
# 30년 걸린 이주, 공해는 신경 못써

이주가 끝나기까지 30년 걸렸어. 처음에는 화력발전소 지어가지고 연기가 이래 날아들어도 크게 신경 안 썼지. 정유공장 앞으로 지나갈 때 냄새나도 그르려니 생각했는데. 동남풍이 불면 화력발전소에서 시커먼 그을음이 와. 그 냄새는 새콤하고 독해. 공해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지. 암으로 죽으면 암으로 죽는 갑다 했지.

마을 재산 보상으로 우리 동네가 제일로 많이 탔지. 우리 동네는 14억. 내 앞으로 부동산이 다 되어 있었는데, 그걸 동네추진위원회 만들어가 살던 사람 갈라줬다 아이가. 한 1,000만 원 가까이 갔을 거야. 그것도 전에 살던 사람하고, 중간에 나간 사람하고, 계속 산 사람들하고 차등을 줬지. 계속 살던 사람들한테는 한 1,000만 원 정도 가까이 갔지.
 

# 87년부터 향우회 시작…1년에 한두번 만나

향우회는 87년도부터 했어. 그때 이미 일부가 나갔거든. 향우회 모임은 지금도 해. 나도 가지. 향우회 회장도 했고, 이제 딴 사람 줬어. 회장한 거는 오래됐다. 두 번째, 세 번째 했지. 그것도 억지로 했다. 안 할라고 하다가. 다운동에 백 명 이주해 왔으면 열 명 살라나! 열 세대 그 정도 살란가 몰라. 같은 동네 살아도 만날 수가 없어. 아침에 나가면 안 보이니까. 문 딱 닫아놓으면 보이질 않지. 향우회 가면 1년에 한두 번씩 만나지.

고향 동네가 공장으로 들어가서 섭섭하지. 요새 정자 바닷가로 가보면 고향 생각이 나는 거라. 정자 저쪽은 들은 없어도 산이 있고, 바다가 있어 먹고 살거든. 용연도 철거되지 말고, 뒤에는 공장을 지어도 바닷가에 마을이 그대로 있었으면 얼마나 살기 좋았겠노. 그런 생각이 들어. 거기는 바다가 소쿠리 모양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포근한 그런 게 있고, 앞은 트여도 바람도 그렇게 안 시고 그랬는데. 바다로 쭉 나가도 수심이 5미터 이상은 안 되거든. 안 깊지. 3미터, 2미터 이정도 밖에 안 되지.

정리=고은정 기자 kowriter1@iusm.co.kr
자료제공 =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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