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부터 습관으로 굳어버린 메모
활자에 집중해 정작 더 중요한 걸 놓쳐
일상 속도 늦추고 디테일의 영역 깨달아

 

김감우 시인

필자는 학창시절 필기의 달인이었다. 특히 맘에 드는 강의는 거의 실시간으로 따라서 적었다. 요즘처럼 녹음을 하거나 사진을 찍는 일이 쉽지 않았던 때, 그 능력(?)은 학습의 효율을 최대치로 끌어내는 방법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결과물은 종종 귀중한 시험 준비 자료가 돼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런 내 습관이 변하게 된 것은 막 등단했을 무렵이었다. 초청 강연을 듣는 자리였는데 열심히 메모하는 나를 지켜보던 선배가 말을 건넸다. 격려가 가득 담긴 그 말에 나는 “제 오랜 습관이에요. 강사의 숨소리 빼고는 다 적는 것이지요.”라고 했다. 딴에는 겸손의 표현이었다.  내 말에 그분은 빙그레 웃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한 마디를 던졌다. “숨소리를 적어야지.”

순간 ‘띵’하고 무언가의 전율이 왔다. 아, 숨소리, 숨소리를 적다니! 강연에서 언어로 표현되지 않은 것이 더 중요하다니, 말과 말사이의 휴식 공간을 받아서 적으라는 그 말이 한편의 시로 다가온 것이다. 상대의 숨소리를 적는다는 말, 그 이전에 그의 숨소리를 듣는다는 말이 너무도 신선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그것은 말을 넘어서 호흡의 결을 느끼라는 뜻이고 상대의 맑은 영혼에 가 닿으라는 가르침이었다. 물론 시를 읽고 쓸 때의 기본적인 자세도 그러하다. 이미 오래 전 일이라 강의가 무엇이었는지는 다 잊었지만 “숨소리를 적어야지”라는 그날의 말은 아직까지 종소리의 잔상처럼 내 속에서 울리고 있다.

최근에 가장 핫한 말을 들라면 ‘봉준호 감독’과 ‘디테일’이라 할 것이다. 황금종려상에 빛나는 그의 영화 기생충이 관객 수 700만을 넘었다고 한다. 필자 역시 개봉을 기다렸다 영화관으로 달려갔었다. 오래 전 개봉한 영화 ‘마더’에서 그가 보여준 몇 장면들이 선명한 채로 남아있던 터였다. 배우들의 표정은 물론이고 배경들이 오래 남는 영화였다. 가령, 부러진 우산의 살이나 그 값으로 지불하던 천원권 지폐, 고물상의 스패너 등 영화 마더에 등장한 사물들이 모두 살아서 표정을 갖고 제몫의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영화 ‘기생충’ 역시 설정이나 대사에 은유가 가득했고 반전에 몰입감이 커서 숨죽이며 관람했다. 그를 봉테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영화에서 보여주는 놀라운 디테일의 힘이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때문이다.

부분, 세부를 뜻하는 디테일이란 말이 점점 우리 일상의 중심부로 자리를 옮기고 있다. “선한 신은 디테일에 있다”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라고도 말한다. 또 “디테일한 맛이 좋네” 등, 그 말은 명사로 동사로 형용사로 우리들의 대화에 두루 쓰이고 있다. 그것은 사회의 가치관이 변화한 것을 반영한다. 그간 우리가 매달려온 발전지향적 삶의 거대담론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목표를 향해 질주하던 일상의 패턴이 속도를 늦추고 자신의 내면을 행해 귀를 갖다 대기 시작했다. 소위 ‘빨리빨리’ 위주의 생활에서 스쳐 지나가버린 것이 어느 날 더 소중해짐을 깨닫게 된다. 그 과정에서 상처받은 자신과 또 주변과의 관계들에 대한 치유가 절실하다는 자성적인 인식인 것이다. 

詩作의 출발, 즉 시의 씨앗(시앗)을 발견하는 일도 당연히 디테일이라는 지점이다. 마음의 부드러운 속살이기도 하고, 꽃잎 지고 미세하게 흔들리는 벚나무의 휘추리 같은 것이다. 흔히 창작은 현상을 새롭게 바라보는 인식의 전환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러한 깨달음은 늘 깨어있는 마음에 깃드는 것이다. 묘계질서(妙契疾書)라는 말이 있다 번쩍 떠오르는 깨달음의 순간을 빠르게 쓴다는 것이다. 시인 정일근은 그의 시 <시는 뱀이 되어>에서 예언을 담은 한 문장이 지나가는 것은 찰나보다 더 짧은 일이라고 했다. 번쩍하며 지나갈 때를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에게는 이런 말이 모두 디테일의 영역으로 다가왔다. 우선 그 발견의 순간을 잘 접하는 일이 먼저다. 사유의 창을 잘 닦아 늘 열어두고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접신 같은 깨달음의 순간은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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