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배호 화백

6·25참전 용사이자 역사 저술가인 TR 페렌바크(1925~2013)는 <이런 전쟁>에서 6·25전쟁에 미국은 전혀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미군의 훈련, 장비, 기강은 해이했다. 미국 정부는 전쟁 발발 전 북한의 남침 가능성 정보를 무시했다. 전쟁 발발 이후에는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다.

핵무기를 손에 쥐고서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까 두려워 소련과의 전면전을 피하는데 급급했다. 공산 진영의 세력 확장 봉쇄 정책을 내세워 제한전을 펼칠 궁리만 했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침략 계획을 은폐하고 남한의 경계 태세를 허물어 버린 뒤 남침에 나섰다. 1950년 6월 7일 김일성은 ‘평화적 조국 통일 호소문’을 발표했다. 8월 5~8일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고, 이를 논의하기 위해 6월 15~17일 남북 대표자 회의를 열자고 제의했다. 6월 10일에는 북이 억류 중인 조만식과 남한에 수감된 남로당 지도자 김삼룡·이주하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6월19일에는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 정부 수립을 제안하며 21일 남북 국회 대표회담을 하자’고 했다. 이처럼 줄기찬 평화 공세에 남한은 경계 빗장을 풀었다. 6월 23일 밤엔 전군 비상 경계령을 해제했고, 24일 토요일에는 장병 외출, 외박과 농번기 휴가까지 시행했다. 다음날 새벽 4시 북한은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

자유민주연구원과 국회 자유포럼이 6월 18일 여론조사 기관 ‘공정’에 의뢰한 조사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북한군과 맞서 싸우겠다’고 응답한 20·30대의 비율이 44%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2015년 국민안전처 여론조사 결과 (20·30대 약 75%)에 비하면 31%포인트나 낮아 역대 최저 수준으로 나타났다. 20대가 40.2%로 가장 낮았고, 30대는 47.8%에 이른다.

이 같은 수치는 문재인 정부 들어 국방백서에 ‘북한=적’개념이 사라진데다 남북 화해 분위기에 따른 안보의식의 약화 때문으로 풀이된다. 정전 협정으로 휴전중인 6·25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다. 항구적인 평화의 길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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