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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기획 대한민국 인류유산 대곡천암각화군
“인류유산 사연댐 물 속 50년 방치는 국가적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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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 승인 2019.07.17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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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매일-반구대포럼 공동 기획 '대한민국 인류유산 대곡천암각화군'
19. 되돌아 보는 천전리, 대곡리 암각화의 발견과 의의 (1)

 

문명대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사연댐 수위조절 암각화 보존안
대곡댐 건설때 문화재위 의결사항
담당자들 바뀌면서 챙기지 못해

 
1970년 발견한 천전리각석
찬 냇물로 씻어낸 명문과 그림들
얼마나 중요한 유적인지 바로 직감

 
최초 암각화 발견 획기적 연구 단초
추상적 동물상·기하학적 문양 결합
세계 제일의 유산·선사미술 정수

 
동국대 발굴조사단이 1970년 12월 24일 천전리각석을 발견된 후 이듬해인 1971년 봄 1차 조사 때 발굴단이 동네주민들과 촬영한 사진. 가장 왼쪽이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 석굴암 조사를 주도한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오른쪽에서 세 번째) 등이다.사진=문명대교수

 우리나라 최초로 암각화를 발견한 것은 1970년 12월 24일 울주군 언양읍 반구대에서 상류로 약 1.5km 떨어진 천전리에서였다. 국보 147호 울주 천전리각석이다. 이 보다 만 1년 후인 1971년 12월 25일에는 반구대에서 1km 하류지점인 대곡리에서 또 하나의 암각화, 국보 285호 반구대 대곡리암각화가 발견되었다.

내년이면 필자가 암각화를 발견한지 50년이 된다. 그동안 보존대책으로 갑론을박하는 사이 반구대암각화는 빠른 속도로 훼손되고 있다. 50년 동안 반구대암각화가 사연댐 물속에서 자맥질을 반복하도록 방치한 것은 국가적 수치다.

더욱 안타까운 일은 사연댐 수위를 낮추어 암각화를 보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공직자들의 무관심속에 날려버린 것이다. 필자가 문화재위원으로 재직 당시인 1990년대 중반에 대곡댐 건설이 허가가 났으며 반구대 암각화(1995년)가 국보로 지정됐다.

당시 대곡댐 건설 원칙에 동의하는 대신 반구대 암각화가 물에 잠기는 것을 막기 위해 사연댐 수위를 8m 낮추어 52m로 유지하는 안을 필자가 제안을 하였고, 다른 위원들이 받아들여 문화재위원회에서 의결됐다. 하지만 대곡댐을 건설하는 데 10년 가까이 걸리는 동안에 필자는 문화재위원을 그만뒀으며 관료들과 실무자들이 다 바뀌는 바람에 사연댐 수위 낮추는 것을 체크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우리 모두에게 책임이 있지만 울산시와 문화재청은 더 큰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무슨 변명을 해도 안 통한다. 우린 문화민족이 아니다. 창피스러운 일이다.

다행히 최근 울산시가 사연댐 수위를 낮추어 반구대 대곡리암각화를 보존하고, 문화재청과 함께 대곡천 반구대암각화군의 세계유산등재에 힘을 모으고 있다고 한다. 국보 147호 울주천전리각석과 국보 285호 반구대암각화를 대곡리와 천전리 마을 주민들의 도움으로 발견하여 학계에 처음으로 보고한 당사자로서 반가운 소식이다. 세계유산등재는 등재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등재과정과 그 이후 해당 문화유산을 잘 보존. 관리하여 후대에 온전히 전승하는 것이 우리의 책무다.

세계유산등재를 신청하는 시점에 즈음하여 발견자로서 암각화 발견 과정과 그 의의를 다시한번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1968년 9월부터 3년 계획으로 동국대학교 박물관 울산지역 불적조사단(佛蹟調査團, 團長 文明大)을 구성하여 울산지역의 불교유적들을 체계적으로 조사하였다. 3년 계획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선 1970년 12월 24일에 언양면 대곡리의 반구대(盤龜臺)의 사지를 조사하게 되어 있었다. 원효대사가 수행하면서 초장관문(初章觀文),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 등 3권의 저술활동에 전념했던 반고사(磻高寺) 터를 탐사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지리적 조건이나 지명뿐만 아니라 사지에 불상 같은 유물이 이미 알려져 있어서 가장 정확한 지점이었다.

 언양(彦陽)에서도 20리나 떨어진 곳이지만 산길을 7~8리 남짓하게 아슬아슬한 어려운 코스를 지나 반구대에 도착하여 마을 유지이며 누대로 집청정이라는 재실을 갖추고 있는 한학자 최경환씨를 찾아 사지(寺址)현황 등을 대개 청취하였다.

집청전 맞은편은 반구대라는 명승지이며 옛날에는 태화강의 지류(支流)인 대곡천의 상류인 반계(磻溪)였고, 지금은 사연댐의 최상부가 되어 거의 물에 잠겼는데 암벽들에는 시(詩)같은 명문과 학 같은 그림이며 불상을 모시던 사지, 정몽주의 이곳 유배를 기념하던 사당지(祠堂址)도 역시 수중에 묻혀버렸다는 것이다. 따라서 반구대의 반고사(磻高寺) 터 조사는 다음으로 미루어야했다.

낙심천만(落心千萬)이었지만 부근의 다른 유적에 대해서 특히 예비조사 때 경주 석용식씨(경주 골동상)로부터 듣게 된 마을 상류 1km 쯤 떨어진 곳에 탑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상세히 문의해 보았더니 그제야 그 분은 약 1㎞ 상류쯤 올라가면 탑거리가 있고 거기에는 아직도 탑이 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탑거리 바로 못 미쳐 절벽의 오솔길을 가면서 돌아오는 길에는 반구대의 학그림을 꼭 보고 가겠다는 말을 주고받다가 최선생이 문득 절벽아래의 바위를 가리키면서 저기도 반구대의 암각화처럼 그림인지 무엇인지 잘 구별할 수 없는 희미한 모양이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기하학 문양들. 울산매일 포토뱅크

나는 직감적으로 사지의 바로 옆이니까 마애불(磨崖佛)일거라 생각하면서 탑은 확인만 하고는 곧장 그곳으로 달려갔다. 바로 한 장의 거석(巨石)이 이끼와 빗물로 덮여있는데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기하학문양과 와권문(渦卷紋)같은 것들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이었다.

바위의 왼쪽편에서부터 살펴보니 바위 하단부에서 이끼에 덮여 있지만 ‘郎’자가 있는 고졸한 명문(銘文)들이 많이 보였고 특히 중간쯤에 20여 줄이 넘는 본격적인 명문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곧 낡은 천을 겨울의 찬 냇물에 적시어 이끼와 오수(汚水)같은 것을 닦아내고 명문의 판독과 그림의 윤곽들을 대충 살펴보았다.

조사를 하면 할수록 이 한 장의 거석이 얼마나 중대한 유적인지를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명문의 고졸성은 그 상한(上限)을 아무리 보아도 고신라(古新羅)의 여러 대(代)에 걸친 것이며 그림들은 신라나 그 이상 훨씬 올라간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중대한 유적을 혹한의 겨울에 아무런 준비 없이 더 이상 조사한다는 것은 무리이며 규모 큰 조사단을 재편성하여 본격적인 조사를 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판단되었다.

그래서 오후 6시경에 일단 철수하였고 그 이튿날 다시 확인한 후 석남사 등 불적 조사는 중지한체, 서울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유적은 그 후 1971년 1월 1일 자 한국일보의 사회면 전면과 정치면 반면에 걸쳐 기사화되었으며 다시 몇 차례의 예비조사를 거친 후에 1971년 4월 10일부터 5월 2일까지 본격적인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후 3년 동안의 실측조사와 10여년 이상 여러 차례의 조사를 거쳐 연구를 진행했다.

이 발견은 몇 가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 한국 최초의 암각화 발견으로 이후 계속된 우리나라 암각화 발견의 단초를 여는 암각화 연구에서 획기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둘째, 천전리 암각화는 1년 후 발견된 대곡리 암각화와 함께 우리나라 암각화는 물론 세계 최고의 암각화 유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셋째, 천전리 암각화는 반사실적 또는 상징적(반추상)인 사슴같은 동물상과 문자적인 기하학적 문양이 결합된 특이한 암각화로써 세계 제일의 선사암각화 유적이다.

넷째, 이들 암각은 한국 선사미술의 정수로써 기하학적 문양도 겹둥근무늬인 동심원의 경우 굵고 깊게 쪼은 페킹 스타일 기법에서 강인한 미의식은 물론 겹타원형에서 힘차게 뻗어나간 직선과 곡선, 가로세로의 파도문이 이루는 역강하면서도 유연한 아름다움, 암수 두 마리가 정답게 마주보는 추상표현주의적이면서도 마음을 잡아끄는 동물상의 아름다움은 선사미술의 백미를 장식하는 점에서 의의가 깊다고 하겠다. 다섯째, 이 암각화를 신라인들은 ‘문암(文岩)’으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들은 ‘문암(文岩)’이라는 좋은 돌(善石)을 얻어 제의의 글을 제작해서 서석(書石)이라 하고 이름 없던 골짜기를 서석곡(書石谷)이라 했던 것이다.

암각을 ‘문(文)’으로 이해했다면 암각화는 오래전부터 그들의 먼 조상인 한부족의 글(文字)로 생각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섯째, 이 선사암각화의 의미를 재발견한 후계인들인 신라인들이 여기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지냈던 신라왕족들의 제의식 제단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일곱째, 신라의 대표적 화랑인 영랑(永郞) 등 화랑도들의 수련처로써도 큰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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