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울산매일-반구대포럼 공동 기획 대한민국 인류유산 '대곡천 암각화군'

22.  천전리 서석곡 명문(銘文)의 가치  

    
신석기~청동기 걸친 문양과 6세기 신라인들이 새긴 명문(銘文) 가득
불교 공인 전·후 신라 왕실 제의 희생 재물→불교의례로 변화 추정
흥륜사 , 황룡사 창건 울산 주민 참여와 협조 속에 이뤄진 정황도 
 `불국토 건설' 이념은 선사부터 다양한 의례 거행된 성소가 있어 가능

울주군 천전리 명문은 전통 제의가 불교 의례로 바뀐 과정을 추론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해 준다. 사진은 6세기 경 신라인들이 새긴 천전리각석 하단부의 한자 명문(좌). 신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까지 선사인들이 새긴 각종 문양(우). 사진=울산암각화박물관

울산의 대곡천 암각화군에 속해있는 천전리 서석곡(이하 서석곡이라 함)에는 초식동물 육식동물 어류 등의 구체적인 동물형상이 새겨져 있다. 동심원과 마름모꼴 물결무늬 소용돌이무늬 등의 기하문도 깊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새 말 용 배와 인물상 등이 가느다란 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들은 신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오랜 시간에 걸쳐서 당시의 사람들이 새긴 것이다. 

또한 글자도 새겨져 있는데 확인된 명문은 513년부터 838년까지 300여년이 넘는 동안에 새긴 1차 사료로서의 소중한 기록이다. 신석기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수 천년 동안의 그림과 문자가 바위 한 면에 표현되어 있다는 것은 긴 시간이 한 공간에 집약되어 있는 소중한 가치를 지닌다. 

# 서석곡이 의례를 거행한 성소(聖所)임을 증명하는 원명(原銘)과 추명(追銘)
 서석곡이 선사시대부터 삶의 절실한 기원을 담아 의례를 거행한 종교적인 성소였음을 알려주는 명문이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서석곡의 원명과 추명에는 이곳에서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의례를 거행하였음을 알려준다. 원명은 525년(법흥왕 12년) 6월 18일 새벽에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이 이곳에 와서 희생제물을 올리며 제의를 거행하였음을 새긴 내용이다. 당시 신라 왕실은 중앙집권적인 강력한 통치국가의 수립을 위해서 불교를 통하여 국민을 결집시키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전통종교는 자연의 신들과 조상신에게 밤의 시간에 희생제물을 바치며 여성사제가 현세의 절실한 문제해결을 기원하는 것이었다. 이에 비해서 이 시기 새로운 종교인 불교는 인도의 석가모니부처에게 새벽의 예불시간에 살생을 하지 않고 향과 꽃을 바치며 스님이 해탈을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명의 내용은 입종갈문왕이 새벽의 예불시간에 여성들을 참여시키며 많은 희생제물을 바친 제의를 거행한 것이었다. 이는 불교와 전통종교를 조화시킨 의례였다. 

추명은 539년(법흥왕 26년) 7월 3일에 진흥왕의 어머니인 지소부인과 법흥왕비인 보도부인, 그리고 어린 진흥왕이 서석곡에 와서 입종갈문왕을 그리워하며 음식을 만들어 바치는 제의를 거행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는 지소부인의 남편이자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이 이곳에 와서 불교와 전통종교를 조화시킨 의례를 거행한 업적을 기리면서 진흥왕도 이를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이 때 거행한 제의에서는 높은 신분의 부인들이 음식을 만들었지만 희생제물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다. 전통종교에 기반을 두면서도 살생금지를 실천한 불교식 제의로서 신라왕실의 이념이 불교로 한걸음 더 나아간 제의형태였음을 알려준다. 

# 신라 불교 정책의 전개 과정을 증명
 입종갈문왕이 이곳에 와서 제의를 거행하고 다녀간 3년 후에 신라에서는 불교를 공인하였으며, 그 이듬해에는 살생금지령을 내리는 등 신라의 불교정책에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 

 갑인명(甲寅銘, 534년, 법흥왕 21년)에는 대왕사(大王寺)에 있는 안장법사(安藏法師)가 다녀갔음을 새겨놓은 것이다. 이때는 신라의 첫 번째 사찰인 흥륜사의 창건공사를 시작하기 1년 전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사찰의 이름과 불교승려의 이름을 서석곡의 바위에 새긴 것이다. 이들이 이곳에 와서 거행한 제의는 불교적인 의례였을 것이다. 이는 불교 공인 이후 법흥왕의 불교이념이 전통종교의 성소에 와서 처음으로 승려에 의해서 불교적인 의례가 실행되었음을 알려준다. 

535년 흥륜사 창건공사를 시작한 해에는 비구승과 사미승 그리고 울산지역 주민이 이곳에 왔다갔음을 기록한 명문을 새겨두었다. 흥륜사를 낙성하기 1년 전인 543년 2월 8일에는 낮은 신분의 여성인 조덕도(兆德刀)가 주인공이 되어 좌우에 행렬을 거느리고 이곳에 와서 제의를 거행하였음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이는 신라왕실의 불교이념이 낮은 신분의 대중들과 여성들에게도 적극 알리고 참여시킴으로서 이들을 포용하고자 하는 불교대중화정책을 펼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흥륜사가 낙성된 이듬해인 545년 9월에는 높은 신분의 여성인 아도랑녀(阿刀郞女) 부인이 낮은 신분의 남성과 함께 대규모의 위세를 갖추고 왔다는 내용이다. 흥륜사의 낙성을 경축하는 의미를 지닌 행차지만 여기에 승려명 승관명 사찰명 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신라왕실의 불교이념이 전통종교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불교와의 조화를 지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신라의 불교이념에 울산지역 주민이 참여했음을 증거하는 명문
  이러한 신라왕실의 불교이념이 울산지역 주민의 참여와 협조 속에서 실현되고 있었음을 을묘명(乙卯銘, 535년, 법흥왕 22년)은 알려주고 있다. 535년 8월 4일에 ‘비구승 안급이(安及以)와 사미승 수내지(首乃至)가 거지벌촌(居知伐村)의 6인 등과 함께 와서 보고 기록한다’는 내용이다. 

이때는 신라의 첫 사찰인 흥륜사를 창건하기 위해 공사를 크게 시작한 해이다. 이곳에 불교 사제인 비구승과 사미승의 고유한 이름이 새겨져 있다. 거지벌촌은 『삼국사기』 권34에 기록되어 있는 거지화현(居知火縣)으로서 현재의 울주군 언양읍을 가리킨다. 신라의 첫 사찰의 창건이 울산지역주민의 참여 속에서 실행되고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다. 

흥륜사 창건공사를 하는 시점에 비구승과 사미승이 울산 지역인들과 함께 왔다는 것은 법흥왕의 불교정책이 울산지역인과의 연대와 협력 속에서 실행되었으며 왕실 중심의 불교가 이 지역을 중심으로 대중화(大衆化)로 나아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신라 불국토 사상의 정착과 울산
서석곡에는 김혜훈의 이름이 2번이나 새겨져 있음이 주목된다. 혜훈은 『삼국유사』 권3 황룡사 장육조에 의하면 황룡사의 주지를 지냈으며 최고의 승관인 국통(國統)의 지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에 만들기 시작하여 17년만인 569년에 완성하였고 장육삼존상은 574년에 완성하였다. 

울산 – 김혜훈 - 황룡사 - 장육존상이 연결되어 있으며, 황룡사의 장육존상 주조가 울산지역과 관련되어 있었다. 인도의 아육왕(인도 마우리야왕조의 3대왕, B.C.270~B.C.230년경 재위)이 보낸 황금 3만근과 황철 5만7천근이 울산의 곡포(谷浦, 絲浦라고도 한다)에 도착하여 황룡사의 장육존상이 만들어졌고, 울산의 동축사에는 아육왕이 보낸 삼존상의 모형이 안치되었다.(『울산읍지』에 의하면 동축사가 원래는 울산시 동구 미포동의 동대산에 있었는데 병자호란 때 불타서 그 부속암자였던 현재의 동축사가 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800여년의 시간을 건너 인도의 서축국이 울산의 동축사로 불교의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울산의 곡포와 동축사가 황룡사의 장육존상과 연결된 불국토이념은 이후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종교적 구심력이 되었다. 이러한 불국토이념이 울산에서 가능하였던 것은 선사시대 이래로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며 다양한 의례를 거행해 온 성소로서의 역사적 경험과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 신라왕실이 전통을 존중하며 참여시킨 아름다운 감동을 담고 있는 유적
 서석곡의 종교융화전통과 울산지역 주민과의 연대를 통해 신라왕실의 절실한 염원인 불교공인과 살생금지 그리고 첫 불교사찰이 낙성되었다. 그리고 울산지역 주민의 협조 속에서 신라 국보1호인 황룡사 장육존상이 불국토사상의 상징으로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신라 불교정책의 시작과 전개과정 그리고 원만한 성취가 서석곡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이곳에 새겨진 명문들은 증거하고 있다. 

서석곡의 역사시대 명문에는 이곳을 다녀간 인물들의 고유한 이름과 신분 역할 등을 구체적으로 새겨놓았다. 세선각화에는 각 인물들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와 함께 당시의 복식 머리장식 행위동작 등이 표현되어 있어 당시 신라인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서석곡은 신라왕실이 기존의 전통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새로운 이념을 조화시킴으로서 순조롭게 뜻을 이루었던 역사적 경험의 교훈을 오늘의 우리에게 전해주는 감동이 담겨있는 유적이다.

강영경 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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