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 개발도상국 지위 포기·RCEP 협상 타결
내년 농림부 예산 비중 사상 첫 3%선 아래까지
소외받는 ‘농심’ 헤아려주는 ‘농업인의 날’ 돼야

유현재
농협경주환경농업교육원 교수

지난 8일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입동(立冬)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수확의 기쁨을 느끼며 고즈넉한 들녘을 거닐고 있을 농민들의 인자한 얼굴이 떠오르겠지만, 최근 화난 농촌의 농심(農心)으로는 무리한 바람이다.
지난 10월 25일 한국은 세계무역기구(WTO) 개발도상국 지위를 포기했고, 이번 주엔 농업에 대한 특별한 대책 없이 RCEP 협상 타결을 이뤄 농업계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이런 협상들은 농업보호보다는 당장 한국 정부와 미국과의 관계 완화와 공산품 수출이 국익에 더 도움이 된다고 판단한 결과이다.

이번에도 여전히 여야 할 것 없이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만들어진 정치적 대책을 내 놓았다. 기존 정책들의 재탕, 삼탕이 여실히 눈에 띄며, 실효성 가능여부가 의심스러울 정치적 발언들도 가득하다. 이런 대책들을 뒤로하고 2020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농림축산식품부 예산 비중은 사상 처음으로 3%선 아래로 떨어질 예정이다.
한국농업인단체연합은 “정부가 농업을 포기했다”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고, 젊은 청년농업인들도 “한국 농업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며 한탄하고 있다. OECD 선진국의 적극적인 농업에 대한 지원과 이번 RCEP 협상에서 농업을 지키기 위해 협상까지 미룬 인도정부의 태도가 부럽다.

이러한 농업에 대한 태도가 57개국과의 FTA로 공산품을 수출하기 위한다는 명목아래 우리 농업을 값싼 수입 농산물과의 무한경쟁에 내몰았고 엄청난 희생을 강요했다. 어느새 2018년 농축산물 수입액은 42조를 넘어서며 사상 최대를 기록했고, 식량 자급률을 OECD 최하위를 기록하고 있다.
어제 11월11일은 1996년에 법정기념일로 제정한 ‘농업인의 날’이다. 하지만 ‘빼빼로데이’는 알아도 ‘농업인의 날’임을 아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다. 11월 11일을 한자로 쓰면 十一월十一일이 된다. 여기서 十와 一를 합하면 土(흙토)가 돼 흙이 두 번 겹치는 土월土일이 된다. ‘농민은 흙을 벗 삼아 흙과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는 농업 철학이 담겨있다. 이런 의미있는 농업인의 날에 빼빼로데이만 챙기는 젊은이들이 많아지면서 상업적 마케팅에 다시 한 번 농업인들은 서럽게 눈물을 흘린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중국 춘추시대 월나라 재상 범려의 말에서 유래된 고사성어가 있다. ‘토끼가 죽으면 토끼를 잡던 사냥개도 필요 없게 되어 주인에게 삶겨 먹히게 된다’는 뜻으로, 필요가 있을 때는 잘 쓰다가 필요가 없어지면 매정하게 내버리는 경우를 비유하는 말이다. 우리 농업이 과거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희생을 강요받았던 과거를 잊고 더 큰 희생을 요구 당하는 토끼가 된 건 아닐까. 농업을 완전히 포기한 선진국은 없다. 아무리 혁신적인 기술을 보유하더라도 사람은 음식으로 에너지를 얻지 못하면 단 한 순간도 생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린 잠시 잊고 있는 건 아닐까.

‘어린이날’은 어린이들이 즐거운 날이다. ‘스승의 날’은 학생들이 선생님들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주고 고마움을 되새기는 날이다. 그럼 11월 11일, ‘농업인의 날’에는 농업인이 주인공이 돼야 당연하지 않은가? 농업인의 날이 흙(土)을 상징하는 날이 돼야하며, 농민의 눈물이 흐르는 모습(1111)으로 전락해서는 안된다. 최근 소외받고 있는 농업인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진정한 ‘농업인의 날’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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