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밀레니엄을 지나 2020년 밝았지만
인류는 여전히 가난·질병에 시달리고 있어
좌절·낙망 속 포기말고 희망품고 나아가야

신호현 시인

2020년 새해가 밝은 지 얼마 안됐는데 벌써 시간은 저리로 달려가고 있다. 아직 2019년 한해도 부지런히 달리느라 정리도 못했는데 시간의 열차는 2020의 철로 위에 올라와 무한 가속을 하고 있다. 열차는 한 번도 역행하거나 멈추지 않았다. 처음엔 비탈길을 오르느라 힘겨워하는 것 같았는데 청춘을 보내고 나니 내리달리는 기차는 점점 가속이다.

1990년대 세기말을 경험한 우리는 X세대들의 폭풍 질주를 보면서 2000년이 열리면 밝고 희망찬 세상이 오리라 꿈꿨다. 2000년이 지나고 2010을 넘어 2020년이 밝았는데 세상의 전쟁은 그치지 않고 가난과 질병은 여전히 인류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정말 세상에는 희망이 있는가. 이대로 계속 달려가면 슬픔의 정점을 넘어 기쁨이 오는가. 절망의 정점을 넘어 희망이 오는가.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그의 저서 <시지프의 신화>에서 시지프가 신의 분노를 사서 의미 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부조리한 고통의 벌을 받았다고 했다. 계곡으로 내려가 바위를 정상으로 밀어 올리면 바위는 다시 계곡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다시 계곡으로 가서 다시 밀어올리기 위해 돌에 다가서서 ‘자, 그래 다시 한 번 해보자’며 기꺼이 반응하는 부조리의 영웅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럼 우리 인간은 어떤가. 어떤 이는 처음 돌 앞에서 서서 돌을 굴리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정상으로 거의 오르다가 끝나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정상에서 성공을 맛보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굴러 떨어진 돌 앞에서 좌절하며 끝나는 이도 있다. 우리 삶의 희망은 산 아래 돌 앞에 설 때 있는지, 아니면 정상에 거의 오른 중에, 아니면 정상에, 그도 아니면 다시 계곡에 내려가 다시 시작하는 지점에 있는지 모른다.

‘희망’은 바라고 또 바라는 마음이다. 바라는 마음은 결코 정상에 올라 더 바랄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다만 처음 시작하거나 중간에 고통이 심해진 사람들에게 희망은 더욱 커져 있을 것이다. 그러니 희망은 고통 속에 함께 있는 것이고, 절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절망이 강해야 희망도 역동적으로 솟구치는 것이다. 시지프는 의미 없는 노동을 반복하는 것 같지만 사실 가장 희망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살며 난관에 부딪히거나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오면 그것은 희망의 시작이다. 그러니 가장 의미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은 시지프의 삶은 희망 있는 삶이었고, 가장 고통스런 삶을 살 것이라 생각한 시지프가 가장 희망적인 삶을 살았다는 역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 한탄할 때, 삶은 희망의 연속이다. 신들은 시지프에게 의미 없는 고통을 벌로 내린 것이 아니라 희망 있는 선물을 준 것이다. 그러기에 시지프는 자살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새롭게 도전하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자 몽테뉴는 ‘고통을 주지 않는 것은 쾌락도 주지 않는다’고 했으며, 프랑스의 제1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비장의 무기가 나에게 있으니 그것은 희망이다’라고 말했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4가지 고통을 ‘생로병사’라 했다. 태어나는 것도 고통이라 했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희망을 갖고 도전하는 일이 의미 있는 일이고 최선의 선택이지 않은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은 좌절과 낙망 속에서 불평하지 말고 다시 도전하고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고난 속에서 희망을 보고 끝까지 돌을 밀어 올리는 사람이고 실패하는 사람은 돌이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 포기하는 사람이다. 물고기는 바다가 깊다고 헤엄치기를 포기하지 않고 새는 하늘이 넓다고 날개를 접지 않는다. 힘겨운 인생을 포기하지 않는 한 희망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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