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에서 휴지 쟁탈 육탄전이 벌어졌다. ‘코로나19’ 환자들을 챙기느라 생필품을 못산 간호사가 제발 사재기를 멈춰달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미국, 영국, 호주 등 선진국으로 불리는 나라들의 엊그제 풍경이다. 그런데 이 사재기 광풍이 한국에서는 비켜가고 있다. BBC, 뉴욕타임스 등 외신에서 이유를 분석할 정도다.

한국 사람의 의연함이 일제강점기, 6·25, IMF 외환위기, 북핵 등 굵직한 위기를 겪은 학습효과라는 것이다. 이 같은 ‘위기 둔감력(鈍感力)’이 바이러스 공포에 맞서는 긍정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둔감력’은 2007년 일본작가 와타나베 준이치가 ‘사소한 일에 동요하지 않는 둔감함이 결국 힘이 된다’며 만든 말이다.

한국 사회는 빈곤사회에서 급격히 발전해 풍요 사회로, 다시 과잉 풍요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젊은 세대는 생필품 곤궁을 직접 경험한 적이 없다. 마트에 가면 늘 물건이 가득 쌓여 있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니 사재기가 필요 없다. 한국에서 생필품 사재기 현상이 없는데 일등공신으로 뽑히는 것은 세계 최고 수준의 유통혁신이라는 사실이 이번 코로나 사태 이후의 새로운 진단이다.

1997년 IMF 외환 위기 때는 우리도 사재기가 심했다. 그때와 달리 어느 나라 보다 우수한 배송 시스템이 있다. 민간 유통 업체들이 구축한 배송 시스템이지만 위기에도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소비자의 믿음이 강하다. 뉴욕타임스에서 언급한 한국의 ‘사회적 신뢰(social trust)'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로 볼 수 있다.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업체 아마존은 코로나 사태이후 주문 폭주를 감당 못해 일부 품목의 미국 국내 배송이 한 달 가까이 지연 될 수 있다고 했다. 한국 온라인 유통업체가 사태 초반 며칠간 배송에 어려움을 격었지만 금세 정상을 되찾은 것과 비교된다.

뿐만 아니라 한국은 거주지 근처 유통채널이 다양하다. 편의점, 동네 수퍼, 대형 할인점이 곳곳에 있다. 온라인 유통도 잘 돼 있어 사재기 필요를 못 느낀다. 거기다 숱한 위기를 거치며 길러진 한국만의 ‘위기 둔감력’이 사재기를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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