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길 주필

 ‘코로나19’로 생긴 뜻밖의 가족과의 시간
  저절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경험
  오늘 지나면 다시 못볼 것처럼 대해야

  완벽한 결혼은 착각이라는 사실
  불륜·이혼·증오·복수·연민 점철된 드라마
“결혼 전 눈을 크게 뜨고 후엔 반쯤 감으라”

 

정확한 통계기록은 없지만 ‘전쟁사’의 관점에서 보면 5월은 전쟁 걱정이 가장 적은 달이라고 한다. 북방 유목민족들은 주로 추수철에 쳐들어 왔다. ‘천고마비’는 가을을 상징하는 고사성어지만 원래는 가을이 되면 변방의 유목민이 쳐들어 올 때가 되었다는 의미였다.
또한 계절의 여왕 5월은 아름다운 자연 뿐 아니라 가족 사랑을 꽃피우는 달이다. 한 우산을 쓴다. 우산 하나에 다 들어간다. 우산이 작거나 찢어져 아빠 엄마 어깨가 젖더라도 새 우산을 펴지 않는다. 좁을수록 가까워진다. 젖을수록 가까워진다. 
신기한 건 가족 수가 아무리 많아도, 우산이 아무리 작아도 한 우산에 다 들어간다는 것이다. 가족 중에 신묘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몸을 자유롭게 팽창, 수축하는 능력. 그들은 강한 비가 오면 몸을 최대한 팽창해 우산의 일부가 된다. 날이 개이면 빠르게 몸을 수축해 다른 가족에게 햇볕을 양보한다. 우리는 그들을 아빠 또는 엄마라 부른다. 가족은 이렇게 서로 기대며 어려운 시간을 견딘다.
가족과 함께 가면 두렵지 않다. 1973년 영국 서머랜드 호텔에 불이 나 51명이 죽고 400여명이 다쳤다. 3,000여 투숙객 중에 가장 무사한 그룹은 가족끼리 온 사람들이었다. 불이 나자 가족의 67%가 함께 움직였지만 친구들과 온 사람들은 75%가 각자 행동했다.
떨어져 있던 가족들도 아수라장에서 서로를 찾아 무사히 빠져 나왔다. 흩어졌던 친구들이 서로 찾아 헤맨 경우는 한 팀도 없었다. 가족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다.
시인 정호승은 “오늘이 지나면 다시 못 볼 사람처럼 가족을 대하라”고 했다. “누구나 가족이 미울 때가 있다. 원수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러나 가족은 언제까지나 미움과 원수의 대상일 수 없다. 아침에 현관 문을 나서는 그 순간부터 서로 영원히 못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가족은 그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 행복은 다른 집 마당에서 찾지 말라”고 했다.
인간이 지금의 모습으로 진화해 온 역사를 살펴보면 ‘가족’이라는 집단을 만들었지만 문명이 발전되면서 가족간 긴밀했던 관계는 느슨해지고, 직접대화하는 시간도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본인의 결혼 여부와 무관하게 생애 전반에서 가장 길게 유지되는 대인 관계는 ‘가족간의 관계’이다.
코로나19 감염 사태로 인해 생겨난 뜻밖의 시간은 가족과의 시간이 언제나 행복하거나, 가족과의 관계가 아무도 노력하지 않는데 저절로 행복해질 수 없음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그런데 최고의 기쁨을 주는 관계일 수 있는 부부관계가 가장 파괴적이고 고통스러운 관계로 변질될 수도 있다. 행복은 인간의 ‘본능’으로 저절로 성취된다고 믿고 있지만 이는 오해일수도 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공개된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한국인의 행복과 삶의 질에 관한 종합 연구’보고서가 주목을 끈다. 사람들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인 행복의 범주에는 사랑, 일과 승진, 건강, 권력과 명예 등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국인들의 1순위 행복기준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 꾸리는 행복한 가정인 것으로 조사됐다.
부부의 인연이란 하늘이 정해준 것이라지만 그 하늘이 원망스러운 때도 있을 것이다. 맺어진 부부의 연에는 악연도 있고, 좋은 연이라고 해도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도 아니다. 부부의 인연을 한탄하는, 그런 복잡한 사정에 다달을 수도 있을 것이다.
완벽한 결혼은 착각이었다. TV 드라마 ‘부부의 세계’는 불륜·이혼·증오·복수·미련·연민·집착·원망을 파격적으로 묘사했다. 모든 부부는 결혼을 한 후에도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지만 상당수는 결국 잔혹한 현실과 맞닥 뜨리게 된다.
‘남자는 오감(五感) 여자는 육감(六感).’ 여성은 남성보다 육감(肉感)이 하나 더 있어 육감(六感)이다. 오래 함께 산 부부 중 아내는 남편이 귀가하는 모습만 봐도 그날 하루가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알아본다.
처음엔 불륜 이야기로 시작했으나 뒤로 갈수록 감정과 관계가 얽히고 설켜 무 자르듯 잘리지 않는 부부관계의 복잡미묘함,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쟁같은 이혼 이야기로 드라마는 막을 내린다.
불륜으로 인한 가정 파탄의 신화적 접근이나 이혼을 통한 관계의 재정립 같은 마무리가 아니라, 깨진 듯 보여도 여전히 이어져 있는 잔인한 부부의 세계를 보여줬다.
남편의 배신에 울부짖는 대신 몸싸움을 불사하는 난타전을 벌이고, 남편에게 돌아오라고 호소하지 않는 주인공은 전례없는 캐릭터였다. 젊은 여성 시청자들에겐 그런 주인공의 행보에 사이다(시원한) 반응이 쏟아졌다.
‘정상가정’을 위해 때론 허울뿐인 남편·아빠도 필요하다는 논리가 드라마에서는 맥을 못췄다. 가부장적 가족제도에 대한 염증, 이혼율의 급증이란 시대적 흐름을 고스란히 보여준 ‘부부의 세계’다.
‘부부의 세계’의 원작인 영국 드라마 ‘닥터 포스터’의 작가 마이크 바틀릿은 “그리스 로마신화의 메데이아(Medeia)에서 영감을 받아 ‘사랑’이라는 약한 고리에서 기인하는 관계, ‘부부’라는 숭고한 인연의 속성을 찾으려고 했다”고 밝혔다.
사람들은 ‘부부’라는 관계를 완전한 형태로 생각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깨지기 쉬우며 깨진다고 끝나는 관계가 아니라는 점을 절실한 심리 묘사로 잘 표현했다.
부부들의 불륜 드라마 한편에 왜 그렇게 열광했을까. 연애는 눈을 멀게 하고 결혼은 시력을 되찾게 한다. 그래서 결혼 전에는 눈을 크게 뜨고 결혼 후에는 반쯤 감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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