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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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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길 주필
  • 승인 2020.05.31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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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년 6월 ‘신(神)의 보복’이란 뜻의 철갑선 네메시스호를 앞세운 48척의 영국함대가 중국에 쳐들어왔다. 함포를 앞세운 영국군이 텐진 인근까지 접근해 베이징을 압박해 오자 청(淸) 왕조는 협상론과 항복의 갈림길에서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끊임없이 중국시장의 개방을 추진했으나, 청 왕조는 중국이 지대물박(地大物博)해서 무역이 필요 없으니 조공이나 하라며 일축하고 있었다. 중국의 무역 제한을 철폐시키고 무역과 군사상의 이권을 선점하는 일은 영국의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청황제 도광제는 강경책으로 전쟁을 유발했다는 이유로 흠차대신 임칙서에게 책임을 물었다. 스스로 망하는 길을 택했다.
임칙서는 결국 쫓겨났다. 아편전쟁의 책임을 임칙서에게 전가한 간신들이 아니었다면 임칙서가 지키려 했던 청나라는 그리 쉽게 무너지지 않았을 것이다.
19세기 초 홍콩은 인구 약 6,000명의 작은 어촌이었다. 아편전쟁에서 패한 중국은 1842년 홍콩을 영국에 할양했고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는 인구가 25만명으로 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본토 부유층이 홍콩으로 대피했다. 1960년대 문화대혁명 땐 저임금 노동자들이 몰려왔다.
1984년 덩샤오핑은 반환을 주저하던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에게 ‘나를 믿어라, 50년 자치를 보장한다’고 거듭강조하며 반환협정을 체결했다. ‘한 국가 두 체제’를 뜻하는 일국양제(一國兩制)의 시발점이다. 홍콩은 홍콩인이 다스린다’는 항인치항(港人治港), ‘높은 수준의 자치를 보장한다’는 고도자치(高度自治)의 3원칙을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1997년 반환 23년만인 2020년 5월 28일 중국 전국인민대표(전인대)가 홍콩 내 반정부 활동을 감시·처벌하는 내용의 홍콩 보안법을 찬성 2,878표, 반대 1표로 통과시켰다. ‘일국양제’와 ‘고도의 자치’ 약속을 깨뜨렸다. 
15억 인구의 이같은 일사불난은 소름을 돋게 한다. 이 와중에 미국과 중국은 홍콩·코로나19 발원지 등을 둘러싸고 사실상 신냉전에 돌입했다. 홍콩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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