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안부 기림의 날’을 맞아
   우리민족 아픔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
  ‘박제인간’ 등 수많은 연극으로 계몽활동
  日문화 잔재 청산 선구자 천재동 재발견

이기우
문화예술관광진흥연구소 대표
천재동연구소장

1946년 여름에 이미 위안부를 소재로 한 연극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뒤늦은 1990년대 와서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이 시작됐고, 2000년대 와서 뮤지컬, 영화가 본격화됐다. 1992년 제4회 전국대학연극제 대상작인 연극 <낭자군>이 위안부를 다룬 한국 최초의 연극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보다 앞선 천재동의 <남매의 비극>은 1946년 올려져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1931년 천재동은 그의 나이 16세 때 연극 <부대장>을 무대에 올린 이래 연극 세계에 빠져들었다. 청년기에는 <박제인간>, <남매의 비극> 들을 무대에 올려 일본 강제병탄기 일본군으로 끌려가거나 위안부라는 치욕적이고 수치스런 삶을 살았던 그 시대 조선인들의 아픔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했다는 것과 민족의 아픈 감정을 어루만지고 그 상처를 치유하며 이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광복 후 우리나라는 일본통치의 식민지 문화 청산은 엄두도 못 낼 상황에 처해 있었다. 천재동 교사(방어진초)는 아동극단과 청년극단을 만들어 소극장 운동을 펼쳤다. 그는 일제로부터 완전한 독립이란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우고 왜색문화 청산이라고 보았다. 그는 아동들의 의식을 바르게 잡아 나가는 방법으로 일제의 잔악성을 알리는 희곡 <박제인간>을 창작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을 박제로 만들어 이용했는데, 광복이 돼 우리는 본래대로 되살아나서 새 삶을 산다’는 내용의 반일물이었다.

천재동은 21세기 들어와서야 가능했던 일본군 위안부로서 조선인 공출여성 문제를 다뤘다. <남매의 비극>은 원양어선을 타는 천재동의 친구 김삭부가 증언한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인데 “태평양 어느 섬에 일본군으로 끌려간 오빠가 그의 앞에 정신대로 끌려온 누이를 보자 그 두 기구한 조선인 남매는 서로 경악하고 참담해 두 남매가 함께 자결했다”는 내용이다.
천재동의 어록에는 “<남매의 비극> 공연 당시 이름 모를 태풍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왜풍이라 불렀고, 이때 바다에 떠 밀려온 목재를 팔아 공연비로 충당했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기상청 자료를 보면 ‘1946년 8월 20일, 태풍에 의한 대한민국 내 10분 최대풍속 순위 46위’(2014.01.13. 자료) 태풍의 이름 또한 없이 공백으로 기록되고 있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지금도 침략과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반성할 줄 모르고 세계 유네스코 기록문화 등재에 그들의 자본력을 앞세워 등재를 저지하려는 그들이기에, 광복 직후 일본 식민지 문화에 대한 천재동의 시대적인 고발은 ‘가히 세계사적인 탈식민지 문화교육의 모델이다’ 할만하다.
20세기 전쟁에서 세계의 수많은 식민지 국가들이 경험했던 문제를 온몸으로 겪었던 천재동은 연극을 통해 민족의 계몽 활동을 펼쳤다. 울산과 부산만의 범주가 아니라 한국적이면서 동아시아적인 위인이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얼마나 치욕적인 가정과 사회문제인지를 무대극으로 연출해 일본식민지 시대를 비판해 우리민족의 자각을 교육자로서 극명히 강조한 것이다. 일본문화 잔재의 청산에 선구자로서 문화와 예술의 시대감각을 지닌 교육자 천재동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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