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강, 동천강 등의 천연 모래사장이 울산 씨름문화의 터전이었다. 울산 씨름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조선 영조때 편찬된 『학성지』에서다. 당시 마두희가 고을민 전체의 축제였다면 씨름대회도 버금가는 놀이로 즐겼다. 근대에 들어서는 1920년대 일제때 추석무렵 열린 병영전국씨름대회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병영씨름대회는 1930년대 중반까지 전국 장사들의 축제였다. 이무렵 울산에 씨름 스타 최소태, 석창하, 박일근, 박시야 등이 장군 칭호에 올라 인기몰이를 했다. 병영 출신 김작지는 1936년 일본에서 스모 선수로 영입할 만큼 뛰어난 씨름꾼이었다.
울산 시민의 씨름 열기는 6·25 전쟁 때도 식지 않았다. 1952년 전국 장사들이 운집해 전쟁의 상처를 달랬다. 태화강 백사장에서 20회(1964)대회까지 열렸던 전국씨름대회는 울산공업센터 공장 건설로 태화강 모래가 건설 골재로 반출되면서 복산동 구 공설운동장, 병영 동천강 백사장, 성남시장 공터 등에서 열렸다.
당시 울산의 씨름은 단순한 오락이나 스포츠가 아니라 시민 정서의 근간을 차지했다. 선수들이 샅바를 잡고 용을 쓰면 “콩깡정을 멕이라” “떡까리 쳐라”는 관중석의 훈수가 열기를 더했다.
9월2일 오후 ‘씨름 전승·발전을 위한 협력 협약식’이 열린 울산시청 7층 상황실에서 황경수 대한씨름협회 부회장이 바닥에 업드려 송철호 시장에게 큰절을 올렸다. 황부회장은 감독시절 이만기 강호동 등 천하장사를 배출해 ‘천하장사 제조기’로 불렸던 한국 씨름의 대부다. ‘천하의 황경수’가 갑자기 송시장에게 큰절을 올리게 된 것은 운영난으로 고사 위기에 몰렸던 울산 돌고래씨름단이 울산시의 중재로 회생케 된데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울산 동구가 운영하던 돌고래씨름단은 조선업 불황 등으로 지난해부터 운영난을 겪었다. 울산시가 중재에 나서 울주군이 돌고래씨름단을 운영키로 하고 협약식을 체결했다. 2000년 1월 26일 창단해 매년 우수한 성적으로 울산 씨름의 명맥을 유지해 온 돌고래씨름단의 승승장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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