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병근 시인·문화평론가  
 

 

풀의 으뜸이자 봄부터 익혀왔던 은근과 끈기의 결정체인 억새
호국정신·역사 서려 있지만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휴식처일 뿐
바람아래 일렁이는 ‘억새 바람’에 정처를 두고 산상의 시인 돼

 

 

온산 가득 짙고 옅은 빛깔들이 울긋불긋 야단스럽게 뒤섞여 청절한 가을하늘 빛이 여과 없이 그것들과 어울려 절묘한 배색 풍경이니 곧 서정시의 한편, ‘가을의 품격’이다. 그런 배경에 나뭇잎을 한잎 두잎 떨구어 내고 메말라 가는 가지와 떨어져 뒹구는 낙엽을 스치는 으스스한 소슬바람에 아낌없이 계절을 앓고 있는 저마다 심상이 낭만의 품격이다.

동화적 사고로 세상은 하늘과 땅으로 구분되어 있다. 하늘에는 바람이 땅에는 풀이 임자이다. 풀의 생명은 만물의 근본이고 줄기와 잎이 연하고 물기가 많아 동식물의 양식이 된다. 풀은 민생의 생활과 생계를 도모하며 ‘민간요법’의 약초가 된다. 풀의 무리를 ‘민초의 세력’으로 의인화하여 백성들의 끈질긴 생명력과 저항의 상징이며, 풀은 바람에 의해 비로소 춤을 추는 풍악의 밑그림으로써 하늘 바람에 ‘바람’이 나야 제격이다. ‘바람이 풀을 움직이게 하는지? 풀의 동요가 바람을 일게 하는지?’ 어쨌든 풀의 소멸로 상생의 순리를 기약하며 여위어 가는 초원을 오히려 무한한 설정의 나라로 동반하는 가을바람이 또한 ‘가을의 품격’을 더 한다.

무한정신노동에 조급증과 불안에 몸과 마음이 잠식당하면서도 좀처럼 휴식 시간을 갖지 못하는 현대인에게 자연의 향연만큼 위로가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휴식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휴식은 풍요하고 윤택한 삶의 질을 위한 또 다른 노동이다. 휴식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차지하는 것이다. 휴식은 휴식하기 위한 용기 있는 자만이 영혼까지 휴식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울주 칠봉(가지산, 신불산. 간월산, 영축산, 재약산, 천황산, 고헌산)을 ‘천하명산 울주7봉’ 으로 명칭을 바꿔 산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콘텐츠를 개발하여 산악관광지로 발전시켜 ‘산악문화’의 메카로 만들자는 슬로건이 있었다. 그런 의지들이 마중물이 되어 울산광역시 울주군, 밀양시, 양산시, 청도군 접경지에 있는 가지산을 중심으로 하늘과 맞닿아 있는 억새밭을 테마로 ‘영남알프스 하늘 억새 길’이 약 30km(코스 5개 구간)로 조성되어 있다.

신불산 고스락에서 멀리 보이는 취서산(영축산)으로 가는 능선은 수십만 평의 평평한 들판이다. 평원 중간에 천혜의 군사 요충지 ‘단조성’터가 있는데 이성은 옛날 신라가 가야를 경계하기 위해 처음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성안에는 물이 풍부한 늪이 있어 관련학계의 연구 대상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 때 암행어사 박문수가 단조성을 둘러보고 “산성의 험준함이 한 명의 장부가 만 명을 당할 수 있는 곳”이라 감탄했다고 한다. 단조성을 품고 있는 이 ‘신불평원’을 억새가 지천이라 ‘억새평원’이라고도 한다.

초신성이 마지막 생명의 에너지를 찬란한 빛으로 발산하고 사라져 가듯 만산홍엽이 ‘가을 화신의 끝’이라면 억새꽃은 봄부터 속으로 익혀 왔던 은근과 끈기로 마침내 묽은 서리 위로 틔워내고 다 가을 갈 때까지 남아 있으니, 그 자취가 풀의 으뜸이다. 가을 산 고스락 자락에 펼쳐있는 평원은 바람과 억새의 유희 장소이다. 소문난 억새의 군락지가 나라 안에 무수하다. 그중에 낙동정맥이 지나가는 연봉 자락에 ‘신불평원’ ‘사자평원’에는 호국의 정신과 아픈 역사의 흔적도 서려 있다. 그러나 자연의 기묘한 출현은 아래 세상의 일에 관심 없다. 오로지 ‘휴식 할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만 힐링의 순간을 제공할 뿐이다.

신불평원 흰머리 억새 은결 속을 헤엄치듯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다가 해거름이 되었다. 영축산 표시석을 등지고 앉아 멀리 천황산, 재약산(사자평원)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있는 마간홍 석양을 바라본다. 이윽고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가는 ‘붉은 억새’ 일체의 향연이 쏴 소리로 평원에 이는 저, 바람아래 일렁이는 ‘억새 바람’에 정처를 두고 산상의 시인이 된다.

바람에 쫓기여 흩어지는 구름사이/달빛에 얹혀 설익은 하얀 너울을 보았다/하얀 고깔무리 홀 옷 속에 돋는 살갗/제살 끼리 추위 떨고 바짝 붙어있다/가을 앞세워 짙어지는 산등성으로/천연스럽게 걸어오는 억새 무리다/된서리 몰고 달려오는 바람 있을세라/몰래 조금조금 걸어와라 소리쳐도/그 소리마저 돌아오지 않는다/멧새 박새 소리 숲길 내는 재촉/다그치니 어쩌라고, 다만/멈추지 못해 울먹이는 백의 군상/가을밤은, 바람과 구름과 달빛을 빚고/소리 없는 억새울음 애틋타 한다. 『억새』의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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