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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길 주필 회상록] 뭐 하러 왔노 <6> 중앙일보시절-198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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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병길 주필
  • 승인 2021.01.13 2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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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장군. 언론탄압도 본격화. 온라인 중앙일보 발췌 연합뉴스

 

 80년 3월 삼성-현대 충돌, 연일 현대 관련기사 취재 지시
 현대중공업 건조 선박 폭발사고 취재 늦어 첫 시말서 
‘5·18’ 광주 봉쇄 후 울산선 로켓표 배터리 품절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979년 12·12 쿠데타로 군권을 잡고 정권 장악을 꿈꾸기 시작한 1980년의 대한민국 정국은 안개속으로 접어들었다.

신군부에게 군부의 장악과 미국의 승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국내 민심이었다. 신군부는 대대적인 언론 조작을 획책 하였다. 전두환이 “언론을 장악해야 천하를 얻는다”는 허문도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조선일보 기자 출신 허문도는 주일 한국대사관의 공보관으로 전직했다. 허문도는 전두환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지금 3김씨나 최규하 대통령의 지도력으로는 나라의 장래가 불안하다. 힘을 바탕으로 한 새 질서가 창출되지 않으면 브라질이나 그리스 꼴이 될지도 모른다”며 전두환을 부추켰다.

허문도는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을 겸임할 때 비서실장으로 발탁되었고,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에 취임하자 정무 비서관이 됐다. 전두환의 귀를 붙잡은 허문도의 야욕은 드디어 언론통폐합까지 밀어붙이는 동력이 되었다.

80년 3월 한국재계의 양대 거목 이병철 삼성그룹회장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충돌은 후일 ‘신군부와의 밀착을 놓고 벌인 갈등’이라고도 했다.

양대 재벌의 싸움은 언론을 매개로 한 여론 전쟁으로 번졌다. 중앙일보가 현대 건설의 부실공사를 문제 삼자, 현대는 80년 3월 15일자 조간신문 부터 중앙일보를 제외한 중앙 일간지에 전 5단의 ‘해명서’를 일제히 게재했다. 중앙 매스컴이 대대적인 집중보도로 여론을 오도하여 현대건설과 현대중공업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해외 공사 수주에도 큰 타격을 입혔다고 주장했다.

양측의 폭로 고발 기사 전쟁이 격화되어 서울시청에 나가 있던 군 언론검열단은 시국기사보다는 이 기사에 신경을 더 썼다. 결국 재계 원로 김용원 경방 회장의 주선으로 양측의 화해 협상이 이루어졌다.

80년 3월, ‘현대왕국’ 울산의 필자는 삼성-현대 양대 재벌 싸움의 한 가운데에서 험난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중앙일보 본사에서는 현대관련 기사 취재 지시가 연일 계속 됐다. 어느날 밤엔 온산공단에서 현대건설이 시공중인 오일탱크 공사의 부실 여부를 체크하라는 취재 지시가 떨어졌다. 한 밤중에 탱크 공사 현장 자신을 찍어 보내야 했다.

출입처 현대중공업에서는 필자를 경계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평소 관계가 돈독했던 D전무 역시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소탈한 D전무가 경계를 늦추면서 화해의 뜻을 밝혀 불편함이 해소됐다.

삼성-현대전이 끝난후 어느날 현대중공업 작업장에서는 건조 선박이 폭발하면서 대형사고가 발생했다. 건조 선박 내부에 가득찬 발화가스가 용접 작업자의 부주의로 폭발하면서 근로자 다수가 사망했다. 그런데 제때 취재가 안돼 조간신문이 특종 보도하고 석간신문 중앙·동아는 낙종하게 됐다. 본사 데스크의 불호령이 떨이지고 기자생활 첫 시말서를 쓰는 곤욕을 치러야 했다.

1980년 봄날은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이 소란했다. 4월에 일어난 사북탄광사건 또는 사북항쟁은 열악한 탄광노동자들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광원들의 어용노조 반대 및 임금 인상 투쟁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신군부의 공권력과 정면으로 충돌한 이사건은 언론통제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당시 탁경명 중앙일보 기자는 다른기자들이 철수한 가운데 홀로 사북 현장을 지켰다. 탁 기자는 합수반 요원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지역대책회의’를 빙자해 주동 광부들을 대거 연행해가는 장면을 카메라로 찍다가 무장군인의 M16 개머리판에 얻어 맞고 쓰러졌다. 군부대로 끌려간 뒤엔 무자비한 폭행과 고문을 당했다.

사북항쟁은 4월 9일 서울 청계피복노조 농성투쟁을 시작으로 노동쟁의가 봇물처럼 터지던 와중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후 4월 24일까지 울산을 비롯한 전국에서 발생한 노동쟁의는 719건에 이르렀다. 대학가 에서도 4월부터 시작된 민주화 투쟁의 격랑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사북항쟁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이미 언론기능이 죽어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앙일보 탁경명 기자에게 가해진 무지비한 폭력은 어느사이 전국의 언론인들에게 저질러지고 있었다.
신군부는 5월 17일, 국무회의를 소집, 이른바 ‘5·17 전국 계엄령’을 의결했다. 계엄령 선포 후, 세상은 쥐 죽은듯 조용해진 것 같았지만 광주에서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었다. 신군부는 특전사 소속 7여단과 11여단 병력을 광주로 내려 보냈다. 5월 17일 오후 광주 상무대 전투교육사령부에선 공수부대병력 1천여명이 작전개시 준비를 마치고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작전명령은 ‘화려한 휴가’였다. 

계엄령하 언론 통제로 광주는 5·18 사태 후 외로운 섬이 되었으며 울산의 필자는 매일 서울 본사에 전화해 ‘광주사태’ 귀동냥을 했지만 사태를 짐작 할 수가 없었다. 1980년 5월은 세상에서 가장 갑갑했던 시절이었다. 광주가 봉쇄되면서 울산에서는 로켓표 배터리가 품절이 됐다. 한동안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릴 수 없는 나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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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길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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