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태
문화도시울산포럼 자문

퇴임하는 송철호시장의 ‘울산 송씨론’ 의지
월천공덕 재임 시절 그 가치 충분히 입증돼
두터운 울산사랑 ‘중시조’ 뜻으로 이어가길

 

 퇴임하는 송철호 시장이 울산 송씨의 시조가 되기를 표방했다. 송 시장이 울산 송씨론을 누누이 강조하더니 지난주 아주 단단히 그 의지를 밝혔다는 것이다. 울산 토박이 여러분에 대한 그간의 고마운 뜻을 전하는 자리였다고 한다.
 송 시장의 뿌리는 여산 송씨다. 임란 때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킬 수 없다'(戰死易 假道難)는 팻말을 걸고 결사항전했던 동래부사 송상현이 대표적 여산 송씨다. 부산의 인물이 된 송상현은 송 시장의 16대 선조다. 시장 퇴임에 맞춰 중시조(中始祖)가 되겠다는 표명은 뜻깊다. 치열한 향전(鄕戰)에 밀렸으나 울산에 대한 애정을 거두지 않고 오히려 두텁게 하겠노란 뜻이 느껴진다.  
 돌이켜 보면 성씨는 신라시대 6성이 창시되고 이웃 나라 성씨까지 더해진 이래 넓게 퍼졌다. 그 가운데 일어서고 가라앉는 가문이 비일비재한 터에 새 종자를 심는 마음으로 중시조가 생겨났다. 중시조의 성립 기준은 주로 과거시험 문과급제였다. 특히 외로운 가문의 급제자가 벼슬로 나아가 새 기풍을 일으켰을 때 중시조로 받들어졌다. 오늘날은 가문의 됨됨이를 시험성적에 기대지도 않고, 본관을 따지는 시대는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이제 송 시장이 중시조 뜻을 세운 바여서 옛 준거에 비춰 볼 수 있겠다. 우선 과거시험에 비견할 사법고시를 본인이 거쳤고, 그의 아들이 국제변호사로서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활약한 시카고 법률사무소에 있다. 그의 두 딸도 사법고시를 거쳤고, 사위들도 같은 코스를 지나왔다. 이래저래 율사 명문을 이룬 송씨 가문이 그 본관을 울산으로 삼는 것은 도시역량의 증대이며 자랑이다. 두 해 전 송 시장이 시카고 상공인들과 경제교섭을 가질 때 오바마 법률사무소의 아들이 나타나자 우호적인 분위기가 됐다는 후일담이 그런 사례가 되겠다. 이제 송 시장은 제7대 울산광역시장으로 울산시사에 기록된다. 그의 시장직 담임은 보수 일색에서 진보로 전환한 첫 사례다. 획기를 그은 것이었다. 다음으로 노무현·문재인 전 대통령과 인권 3인방 역할을 수행했다는 점이다. 6.29선언 이후 노동·인권 문제와 부딪친 그의 활약은 울산노동사 또는 민주화운동사에 두드러진다. 또 3인방 유대가 KTX울산역 유치와 UNIST 설립에 역할을 한 점도 기억될 것이다. 송 시장은 40년 전 울산 중구 성안동의 백양사에서 사법시험 책 보따리를 풀었다. 그때부터 높은 산 넓은 바다를 낀 울산고을에 흠뻑 빠졌다고 한다. 뿌리 내릴 거름도 착실히 준비했는데, 울산광역시 승격운동이 계기였다. 백만시민 서명운동을 전개하며 시민사회와 동화됐다. 시련 없이 인물이 나지 않는다. 송 시장도 오늘의 중시조 입지를 굳히는 데는 통틀어 10전 1승이란 고난을 거쳤다. 그 고난 가운데 시민을 속여 표를 강탈했다는 허위주장을 뒤집어쓴 것이 가장 아플 것이다. 그것은 표를 준 시민을 모독하는 것이요, 도시를 욕되게 하는 짓이었다. 그것이 많은 것을 바꿔놓았다. 시장 재직 때의 치적은 훗날 평가되겠지만, 지금이라도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은 해묵은 숙원을 시원스레 해결한 것이었다. 꽉 막힌 외곽순환도로 해결, 10년을 끌던 공공의료원 해결, 에너지산업의 기틀다짐 등 9개의 성장다리를 놓았다. 옛사람들이 가장 높은 가치를 매겼던 '다리 놓아 주기' 즉 월천공덕(越川功德)이 이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송 시장은 젊은 시절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시계도 벗을 겨를 없이 뛰어들어 구했던 의기도 , 이웃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추는 호기도 있다. 변함없는 그의 장점은 선의와 진정성이다. 그가 석별의 자리에서 띄운 울산 송씨론은 깊은 유머다. 산 건너 물 건너 여기까지 이른 맵고 짠 시절을 결산하고 앞으로 자녀들과 울산사람으로 길이 살겠다는 다짐이다. 

김한태
문화도시울산포럼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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